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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우리 Jun 20. 2024

나는 왜 비혼주의자였나?

비혼주의였던 아빠의 육아일기

서른아홉이 되던 해 사회는 코로나-19 이슈로 공포에 떨고 있었고 그해 여름 나는 결혼을 했다.

흔히 결혼을 준비하면 제일 먼저 '스드메'를 알아보고 예약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준비과정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다.  스튜디오는 생략되었고 대신 주말을 이용해 제주도에서 스냅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드레스와 메이크업 최소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것을 간소화시켰다. 원래는 발품을 팔아 비교하고 선택하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결혼식 당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칮아 온 손님만 있었고 -의리로 찾아 주신 분들이 너무나 감사했다- 식사도 답례품으로 대체되었다. 신혼여행은 70~80년대처럼 제주도가 최선이었고 항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진(?)풍경을 낳았던 결혼식이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에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이라 예식장 참석 최소인원 제한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와 2개월 뒤 혼인신고를 마치고 신혼생활을 3년간 보낸 뒤 예쁜 딸을 낳다. 이 과정을 코로나-19가 함께 하고 있었다. 돌아가며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고생도 해봤고 가고 싶었던 해외는 가지도 못한 채 국내 위주로 여행을 다녔다. 

결혼할 당시만 하더라도 내 나이가 많아 아기 생각이 별로 없었던 나와 아내는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했지만 코로나-19가 잠잠해지자 우리의 마음가짐도 변화가 찾아와 결국 아기를 낳게 되었다.


누군가는'이게 무슨 비혼주의야. 평범하게 살고 있구먼' 할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나는 지금 아주 평범하게 고 있는 늦깎이 애기아빠이다. 하지만 난 분명 비혼주의자였다.

비혼주의....결혼식(사실혼 포함)을 하지 않고 살아 긴다는 것.

동거도 비혼주의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비혼주의는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것에 더 가까웠다.

비혼주의도 자발적 비혼주의가 더 정석에 가깝겠지만 나는 비자발적 비혼주의에 가까웠다.

내가 정의하는 비자발적 비혼주의는 개인사정 즉, 경제적, 사회적, 가정적 이유 등으로 인해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은 그런 경우이다.

어릴적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은 어려웠고 힘겹게 들어간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엔 경제관도 뚜렷하지 않아 취직보다 나의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모아놓은 돈은 없었고 나중에 철이 들어 다시 공부를 더 하겠다고 편입까지 하는 바람에 서른하나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경제생활이라고 해봐야 짧게 경험한 직장생활과 용돈, 등록금을 위한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서른하나, 나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될 무렵 나의 통장에는 300만원이 전부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서른하나 정도면 보통정도의 사회초년생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졸업할 당시 초년생이라기엔 이 늦은 나이였다.

직장도 그랬다. 번듯한 대기업이리면야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겠지만 첫 입사한 곳이 대안학교였다. 예전에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어 사범대에 편입했는데 학생신분일 때 대안학교서 봉사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어쩌면 임용시험에 대한 불안감과 부담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입사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살의 나처럼 이때도 경제관도 없었던 것 같다. 한 달에 세전 150만원을 받고 10시간 넘게  일했으니 말이다. 월급을 받으면 월세와 공과금, 생활비,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제외하고 나면 30만원정도 저축을 할 수 있었다. 사명감만 있고 가성비가 없는  직장생활은 나를 지치게 했고 나는 여러 이유-서운한 일과 미안한 일 등-로 대안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대안학교 교육도 결국 대안이 안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공교육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서른두 살쯤이었다. 당시엔 기간제 교사로 일하면서 좋았던 것들이 많았다.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교사와 사명감을 얼마든지 발현할 수 있는 학교현장, 호봉에 따른 보수규칙 등이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교사가 되고 싶었고 그동안 회피했던 임용시험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소위 '올인'이라는 것 해봤다. 여러 걱정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임용시험에 도전을 해 불안정한 삶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노력만 있고 아무런 정보 없이 도전했던 시험은 만만치 않았다. 괜히 '임용고시'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었다. 1년을 준비하고 도전했던 시험에서의 어이없는 점수로 낙방을 하고 앞으로 어찌해야하나 싶었다. 내 나이도 30대 중반을 넘어섰고 다시 도전하기엔 모아 둔 돈도 다 쓴 상태였다. 결국 일을 히면서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기간제 교사로 무를 하게 되었다.

'주경야독'이 말이 나에게 쓰일 줄은 예상도 못했다. 한 달간 일하고 급여를 받으면 생활 필수 금액들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저축을 했다. 재테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오로지 빨리 임용시험에 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고 나의 능력도 부족한 탓에 매번 시험에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날카로웠고 예민하기만 한 '기간제교사'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교사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렇지만 주위 좋은 동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서른아홉이 되던 해까지 나는 일한 돈으로 저축만 했었다.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활비, 인강비 등을 제외하면 모아둔 돈은 얼미 되지 않았다. 운 좋겠도 이때는 6년간 만난 인생의 반쪽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결혼 생각은 없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가 아니라 '못하겠다'가 더 맞지 싶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집값이 전국에서 제일 비싼 '서울'이 아니던가.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결혼보다 그냥 연애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결혼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대상이 있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과 주변의 여건이 맞아떨어질 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앞 두 가지는 충족 되었지만 주변의 여건이 맞지 않아서 결혼 생각이 없었다. 본가에도 이야기해본 적도 없고 본가에서도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해줄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다 보니 결혼을 재촉하지도 안았다. 주변에서도 언제 결혼하는지 물어보곤 했는데 '모르겠어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제가 준비가 안 돼서요', '글쎄요~' 등으로 말하며 소극적이고 회피 대답만 하였 것 같다.

이렇듯 생활 가능한 여건을 마련하지 못한 나는 비자발적 비혼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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