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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우리 Jun 22. 2024

인연은 따로 있다.

비혼주의였던 아빠의 육아일기

그때...결혼은 몰라도 연애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혼자였으며 아직까지 다친 마음이 치유되지 못한 채 마치 나는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어 더 그랬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임용시험이라는 압박감 속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타지에서 번듯한 일자리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

타지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당시 공부를 해야 했기에 시간과 돈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일은 기간제 교사였다. 여러 곳에 지원서를 넣고 연락도 받았지만 결국 중증 특수학교에 기간제교사로 가기로 했다. 그 사이 혼자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잠시 본가에 내려가 머물기도 했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모르겠다. 앞에서의 감정들이 요동을 치다가도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평안했고 생각도 단순해서 좋았다. 나의 대소사들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면 되기에 혼자가 편했다. 계약직 교사지만 다시 학교에서 일을 한다는 안도감과 3월부터 다시 임용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 감사했고 또 지금은 연락을 안 하지만 주변에 응원해 준 분들께도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선을 타고 있을 무렵 나의 1~2월이 마무리되고 있었고 새 학기를 위한 출근일을 맞이했다.


그 해 새롭게 들어온 교사들은 대략 7명 정도였다. 그중 여자 교사가 대부분이었으나 나이는 내가 제일 많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입을 닫고 혼자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평소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카페 창가에 앉아 밖을 보기도 하는데 위와 같은 상황이면 나의 학생들 이외에는 접촉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누군가는 이런 성격으로 무슨 연애를 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아무튼 전교사 회의 시간에 인사를 하는데 한 명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저분은 진짜 찐 교사같이 생기셨네.' , '저 선생님은 되게 젊어 보이신다..', '저 선생님은 키가 크시고 목소리도 좋으시네..' 등 사람들의 말과 행동, 외모 등에서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다음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인사를 했었다.

소개가 끝나고 새 학기 반을 배정받는데 나 혼자 담임교사로 배정받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이가 많아서 잘하겠거니 생각하셨다고 한다. 혼자 담임이 된 것에 대한 충격, 첫 담임이라는 부담감 등이 나를 더욱 위축 들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상태에서 3월 신학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정신없이 학교를 다녔다. 처음 경험하는 특수학교인 데다 중증의 지체장애학교라 더욱 부담감이 다. 그래도 그냥 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을 취소할 수도 없었고 날카로운 학부모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몸도 마음도 학교에 적응할 무렵 퇴근길에 동기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이쪽으로 가세요.? 어디 사세요..?' 대략 이런 대화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곤 임용시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 함께 스터디를 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그렇게 다음 나만 교실이 있었기에 어제 만났던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이 모여 스터디 이야기를 했다. 나, 어제 퇴근길에 만난 선생님, 우리 부서의 막내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당시 부서 부장님도 늦게 퇴근하셨는데 공부를 적극 지지 해주셨기 때문에 남아서도 부담 없이 임용 이야기를 있었던 같다. 가끔 학교 행사가 있거나 일정이 있으면 연기되기도 했지만 스터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셋은 동기들 중 더욱 친해지게 되었고 나중에 초등에 있는 선생님까지 해서 넷이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 선생님은 각 선생님의 이름을 따서 '우주라미'라는 사조직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스터디가 없는 날도 가끔 퇴근 후 식사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가자며 일정을 잡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공부를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후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현재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으니...-


인연은 따로 있었다...

역시나 '인만추'보다는 '자만추'였다. 스터디를 하다 보니 우리 부서 막내선생님이 역시 엘리트였다. 다들 인정하는 것이 좋은 학교를 나왔고 아는 것도 많았다. 수업도 열심히 하고 젊은 20대 교사의 표본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땐 내가 아는 것이 없어 물어보기도 하고 자료가 있으면 받기도 하였다. 가끔 내가 좋은 연수가 있으면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네~'라고 대답해 주는 것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 선생님 모교에서 연수도 듣기도 하였다. 연수를 듣고 차라도 한잔 하고 헤어지기도 했는데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밝은 모습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분이어서 그날 저녁 카페에서 이야기할 때까지 속사정이 있는지도 몰랐다. 매일 아침마다 일찍 출근하는 이유도 모두 납득이 되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연애 감정이 싹튼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9살'이라는 나이 차는 나 스스로도 허용이 안 되고 또 가진 것 하나 없고 능력도 없어 누군가의 앞길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도 않았다.

간혹 학교 내에서 선생님들이 나에게 '선생님 여자친구 있어?'라고 물어보면 '없습니다...'라고 답하면 '아.. 소개팅 시켜줄까?'가 아니었다. '아.. 나중에 좋은 사람 소개해줄게..'였다.. 이 말은 '소개팅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오랫동안 경험해서 너무나도 잘 알기에.. '네'라고 답하고 말았다.

이렇듯 내 사정을 내가 잘 알기에 연애를 하고 싶다 가도 나는 혼자가 맞다고 늘 생각해 마음의 벽을 아주 높게 쌓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의 벽도 결국 사람에 의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막내 선생님과 연수도 갔다 오고 스터디도 하고 모르는 것도 알려주고 하다 보니 가장 친해진 교사였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은 '사직동' 이야기를 하다 '라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다 '가볼래요?'라고 물었는데

'네'라고 하길래 주말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진짜 미안하게도 나는 좋은 카페를 소개해 준다는 마음으로 가자고 한 것이었는데 지금 아내에게 물어보니 그때 너무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매번 듣는다.-미안합니다.-

사직동에서 만나 '사직동 그 가게'를 들러 라씨를 사주고는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주말이 지나고 평소같이 학교 생활을 하다가도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종종 생겼다. 같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학교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각자 집으로 가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막내 선생님이 가장 편한 사이가 되었고 감사한 분이 되었다. 웃는 모습, 항상 밝은 모습이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 고백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역시나 막내 선생님도 마음이 있어서인지 먼저 이야기를 해버렸다.-아직도 핀잔을 듣고 있지만... 난 내가 더 좋아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9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그날부터 1일 차가 되었다. 그날 각자 집으로 가고 나는 집에서 혼자 한숨도 못 자고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뭐라고 썼는지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꼭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 튀어나온 말이 여러 위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너그러운 막내 선생님 덕분에 모두 이겨낼 수 있었다. 아마 아내가 아니었으면 진작 본가에 내려가지 않았을까? 힘든 시기에 나에게 가장 좋은 인연을 만났기에 늘 고맙고 사랑스러운 막내 선생님이다.

그렇지만 6년간 연애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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