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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ffalobunch Apr 22. 2019

죽음과 돌아감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표현들이 존재한다. 보통 ‘죽었다’라는 말을 쓰는데, 나이가 있으신 분들께는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주로 쓴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현상은 현재형으로 쓰지 않고 반드시 과거형으로 쓴다. 보통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셨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말을 높여서 '죽으셨다'라고 쓰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경어체 정도로 생각하면 되려나? 잘 모르겠다.

생각건대, '죽었다'라는 말은 생물학적인 의미로의 생의 마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즉,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몸속의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 생성되는 세포의 수가 죽는 세포의 수 보다 많으면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고, 생성되는 세포의 수 보다 죽는 세포의 수가 많아지는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늙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돌아가셨다'라는 의미는 좀 더 철학적인 의미로의 생의 마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종교를 믿든, 혹은 믿지 않든 상관없이 각자가 생각하는 생의 근원적인 부분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일 것 같다.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무(無)의 존재였다면 다시 그 무(無)의 존재가 되는 것일 테고,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일 테고, 영혼과 육체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한다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만 존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일 테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죄 사함을 받아 구원으로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테고, 윤회에 따라 죽음은 곧 다른 시작이 될 테고 따라서 죽음은 현생의 업으로 인한 후생의 시작점이 되는 것일 테고, 아무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돌아가셨다'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사촌 여동생의 49제 마지막 제사가 있었다. 종교를 떠나 사촌 여동생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당연히 참석했다. 서른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 꽃이 피지도 못한 채 져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중환자실에서의 생활. 나는 당장의 급한 일들을 빼고는 그의 안위를 살피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병실에 누워 혼자 힘겨운 싸움을 이어 나가는 그의 모습을 마음으로 응원해 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뇌사 판정. 현실은 암담했고 결과는 뻔히 보였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가족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렇게 연명 치료를 이어가던 사촌 여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과 이별하였고, 당신의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1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나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었던 착하고 어진 딸이었다. 밝고 사교성도 좋아 주변에 친구가 많았던 딸이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한걸음 달려와 준 수십 명의 친구들. 서른 살이면 다들 다 컸다고는 하지만 부모의 눈에는 한없이 어린 딸,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앳된 모습에 딸의 죽음은 더욱더 안타깝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너 대신 먼저 가겠다고 말하는 큰고모의 모습. 죽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산 사람들의 절규는 생의 허무함으로 남았다.

죽음 뒤의 일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에 '돌아가셨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돌아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의 슬픔은 정말 잠깐의 헤어짐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지금 느끼는 슬픔을 조금은 덜어 드릴 수 있을 텐데.

부모를 앞선 자식이 세상과 먼저 이별을 하게 될 때, 그 부모가 겪는 스트레스의 수치는 우리가 느끼는 손과 발이 절단되는 고통과 맞먹는다고 한다. 이는 어머니의 생 살을 찢고 세상 밖을 나온 아이가 주는 출산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이다. 생 살이 찢기는 고통 보다도 태어남으로 느끼는 기쁨이 더 컸던 그 자식을 오히려 먼저 잃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살이 찢기는 고통을 넘어 손과 발이 잘려나가는 것만큼의 큰 아픔이라는 것이다.

사촌 여동생의 첫째 언니가 차가워진 동생의 볼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온기를 불어넣으려 애쓰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 '다음 세상에서는 내 언니로 태어나줘'라고 말하는 이 말도 안 되게 영화 같이 슬픈 장면이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같은 공간에서 슬픔을 나누는 것 밖에.  그동안 나름 많은 경험들을 하고 살아왔기에 어떤 큰일이 닥쳐도 무덤덤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죽음에 대해 무뎌질 것이라 여겼던 것 자체가 착각이었다. 죽음은 매번 새롭고 매번 슬프고 매번 아프다.





연세가 아흔이 넘으신 우리 할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좋아지셨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꾸 무슨 일들이 일어나니 세상에 원망 아닌 원망만 늘어 놓는다. 물론 스스로가 자각하고 정신 차리는  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 부여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신의 부모의 일이므로, 내가 느끼는 우리 부모님에 대한 마음과 다를  없다는 생각에 급격히 슬픔에 잠겼다. 당장에 할아버지의 내일이 없다면, 오늘 내가 뵙지 못한 순간을 후회할  같았다. 이틀에  끼를 겨우 드시는 상황이라 걱정이 많이 됐는데, 할아버지 곁에서 너스레를 떠는 철없는 손자를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끼를 거뜬히 드셨다. 이로써 나는 안도를 하며 한주를  보내게  것이다.

죽음에 다다르는 속도는 누구도 가늠할  없다.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 앞에는 순서가 없지 않은가?  불현듯 들었던 머릿속의 생각들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해서 발생할  있는 불행한 미래 때문에 후회로운 과거로 괴로워하기 싫었다. 그래서 오랜 고민보다 즉흥적인 결정을 하는 순간도 생기는  같다. 평소의 성격이라면 며칠을 고민했을 선택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죽고 돌아가다시 현생에 되돌아올  없다. 전생이 있다고 믿고 후생을 기대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순간은 지금 뿐이지 않는가. 그러니 후회를 남기지 말자.

호흡기에 의지한  병상에 누워 홀로 싸우는 중에도, 큰고모 가족들과 친구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전해질  눈가에 눈물이 맺혔던 사촌 여동생은 뇌사 상태로는 2주도 버티기 힘들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들에게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달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버텼다. 끝까지 착하고 어진 딸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었다.

나는 영정 사진 앞에서  일이 바빠 자주 왕래를 못했던 미안한 시간들 대신해 앞으로 남은 가족들과 언니 동생들이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 주겠다며 다짐을 했다. 부디 행복했던 기억만 가지고 평안히 돌아가기를 빈다. 그리고 훗날 우리 다시 만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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