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맞이해서 오랜만에 고향 부산에 내려왔다. 대학이며 취업이며 나는 고향 떠나 산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부모님은 20년을 넘게 같은 부산 아파트에 쭉 살아오셨다. 덕분에 부모님 뵈러 내려올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동네 모습에서 사뭇 세월의 속도를 실감하곤 했다.
“엇 여기는 옛날에 누가 살던 집인데, 엇 저기는 이렇게 바뀌었네? 엇 여기는.. 엇 저기는...” 눈에 익은 골목골목의 낯선 것들에 눈이 갈 때 즈음, 낡고 익숙한 건물에 붙은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OO맨션 가로주택정비사업! 조합설립인가!’ “우와! 저곳은 예전에 친구가 살았던 집인데, 이제야 재개발되는구나! 그 당시도 엄청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그나저나 저곳 사람들 한 푼 좀 챙기겠네!” 습관적으로 재개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고, 부동산 시세를 검색해 봤다. 소규모 재개발이긴 하지만 대기업이 붙은 곳이라 제법 거래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있던 로또 종이를 꺼내 만지작 거렸다. ‘내가 1등만 되어봐라..’
가장 최근 나의 관심사라고 한다면, 어쨌든 취업 문턱을 넘어 목에 회사 이름의 목줄 하나를 자랑스럽게 차고 피 땀 눈물 흘려가며 받은 코 묻은 월급으로 이것저것 가심비의 소비를 통해 끊임없는 카드사와의 밀당에 지쳐가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것, 바로 경제적 자유이다. 물론 경제적 자유라는 이름의 한탕주의에 빠진 로또충에 불과하겠지만, 번개 맞을 확률 보다 더 힘든 경제적 자유로(路)의 통행권이 꽝인 줄도 모르고 매주마다 만지작 거리며 헛헛하지만 달콤한 꿈을 꾸는 중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리.. ‘요즘은 로또 1등이 되어도 서울에 아파트 한채 사기 힘들다.’ 맞다. 물가는 오르는데 로또 1등 당첨금은 점점 줄고, 통장 잔고도 줄고, 늘어나는 것이라곤 비대해진 꿈과 몸무게뿐이었다. 어찌 됐던 경제적 자유라는 부푼 꿈을 안고 누구나 그렇듯, 열심히 자기 계발서, 경제서적, 유튜브 및 각종 매체의 바다 위에 몸을 맡겼다. 경제적 자유라는 신대륙을 찾아 떠나는 21세기 콜럼버스라도 된 것 마냥.
‘아껴야 잘 산다, 티끌 모아 태산!’이 통하던 시절, 우리 할아버지는 ‘아껴야 잘 산다’를 누구보다 신봉하시던 구두쇠의 표본이었다. 손 크고 퍼주는 것 좋아하시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더더욱 구두쇠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끼는 것이 몸에 배이셔서 그랬는지 모든 걸 다 아끼셨다. 감정 표현도 극도로 아끼셔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표본 중의 표본이었다. 살아생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MBTI 검사를 하셨다면 틀림없이 할아버지께서는 극I, 할머니께서는 극E 였을 것이다. 그렇게 대척점에 계셨던 두 분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항상 부딪히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금정산 산자락 밑, 툇마루가 있는 작은 주택에 사셨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부터 사신 곳이니 50년은 거뜬히 넘은 집이었을 것이다. 늘 명절에 할머니 할아버지댁에 가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1.5층짜리 작은 다락방이 있었고, 그 다락방 창문으로 연결된 옥상이 있었다. 다락방을 아지트로 쓰는 삼촌과 숨바꼭질을 하거나 케케묵은 홀아비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그 다락방이 뭐가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면 다락방 밑 부엌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요즘은 찾기 힘든 시골 고향의 추억을 어린 나이에 간접 경험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옛 추억 가득한 이곳에 재개발 바람이 소문을 타고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너무 어렸을 때라 재개발이 뭔지 몰랐지만, 정든 집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했던 것 같다. 지금이었으면 이런 행운이 어디 있으랴 기뻐 날뛰었을 텐데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댁 일대의 재개발 계획은 어느덧 인가가 났고, 재개발 보상금과 재개발 입주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인생에 기회가 몇 번은 찾아온다고 했다. 어쨌든 아껴야 잘 산다가 인에 박힌 삶을 살아오신 할아버지께서는 재개발 입주권이 아닌 재개발 보상금을 선택하셨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재개발 입주권을 위한 비용 지불 의사가 전혀 없으셨다. 물론 경제권을 가진 당신의 결정도 신중한 고민 끝에 내린 것이었겠지만, 할아버지는 간사한 우리가 결과에 끼워 맞춘 합리화 속에서 아쉬운 속내를 지금까지 드러내고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작은 빌라로 이사를 나오셨고, 재개발 바람이 불었던 그 부지에는 1306세대 15동에 달하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섰다.
그 작은 빌라는 두 분의 남은 여생을 함께한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한해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불편함을 몸소 느끼셨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드셨고, 어느새 밖을 나서는 것이 큰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애지중지 아꼈으면서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아껴야 잘 산다는 말이 옛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 그랬다. 맛있는 걸 아끼고 아끼다 보면 결국 그 사람은 선택의 순간 항상 맛있는 걸 먹지 못한다고 말이다. 아끼는 게 능사가 아니며,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인에 박힌 내 모습을 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남겨진 빌라는 고모들이 상속을 받았고, 그들은 이를 처분하여 달랑 몇천만 원으로 나눠가졌다.
그리고 몇 년 뒤 그곳은 뜻밖의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아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