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는 의식 중 '책장 정리'만큼 비장한 게 또 있을까. 꽉 들어찬 책장을 보니 한숨이 먼저 나온다. 비워야 새로운 공기가 흐르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설렘이 채워질 텐데.
나는 비장하게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이제 우리 집 책장도 숨 좀 쉬게 해 주자.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야? 나머지는 이제 안녕해주기로 하자."
막내의 대답은 0.1초 만에 돌아왔다.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흔한 남매! 웃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거 말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내심 내가 공들여 읽어주던 명작 동화나, 아이가 처음으로 문장을 뗐던 그 소중한 그림책 한 권쯤은 붙잡아주길 바랐던 모양이다.
"엄마, 근데 난 추억이 다 많은 책인데..."
아이도 알고 있었던 거다. 책장 칸칸이 박힌 건 종이 뭉치가 아니라, 엄마와 함께 깔깔거리며 넘기던 시간이었다는 걸. 그래, 우리 추억을 어떻게 함부로 버리겠니. 감동이 밀려오려는 찰나, 아이가 쐐기를 박았다.
"엄마, 영어책은 다 버려도 돼!"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방금까지 추억을 논하며 촉촉해졌던 아이는 어디 가고, 영어책을 바라보는 시선엔 단 1%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 그건 엄마가 좀 곤란하지"
아이에게 '추억'의 범주는 명확했다. 웃음이 났던 만화책과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동화책은 '사랑'이지만, 알파벳이 빼곡한 영어책은 그저 '해치워야 할 숙제'였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지 못했다. 추억이 많아서 못 버리는 책들과, 엄마의 본전 생각(혹시 모를 미래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못 버리는 영어책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데, 우리 집 책장은 오늘도 '아이의 추억'과 '엄마의 욕심' 사이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 중이다.
올해도 정리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