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카페라는 무대 위에서 바리스타를 연기한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 펼쳐진다. 원두 갈리는 소리가 바에 울려 퍼지고, 에스프레소 머신은 나보다 먼저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일을 다한다. 커피 추출이 끝나고 마지막 한 방울이 샷 글라스에 ‘톡’하고 떨어지는 그 순간, 오늘도 내 자존심이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앉을 거라는 예감이 스며든다. 그리고 바 안을 분주히 오가는 동료들의 얼굴엔 애써 지은 눈웃음 위에 드리운 피로가 아른거린다.
오늘따라 POS 앞에서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손님들이 유난히 많다. “환영합니다.”하고 건네는 내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 뿐이다. 그들은 나를 단지 주문을 처리하는 기계쯤으로 여기는 것일까. 키오스크에 인사를 건네는 바보는 없으니까. 혹여나 주문을 받다가 음악 소리와 커피 머신 소음에 손님의 말이 묻히면, 불안이 심장을 조용히 두드린다. 다시 한번 말씀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순간, 기계의 처리 과정이 불편하기라도 한 듯 짜증을 낼까 봐 두려워서이다. 무사히 결제를 마치고 나서도 왠지 모를 불편함이 혀끝에 맴돌아 마지막 인사가 망설여진다. 그래도 나는 어김없이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고 말한다. 씁쓸하게도 표정 없는 손님은 대꾸도 없이 돌아선다. 내 말의 끝자락이 손님의 뒤를 쫓다 결국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비슷한 장면들이 여러 번 반복된다. 답장을 받지 못한 인사들은 완전히 죽지 못한 채 유령처럼 내 곁에서 자존감을 살살 긁어먹는다. 시나브로 자존감이 파리해질수록 목소리는 교탁 앞에 홀로 불려 나온 아이처럼 위축된다. 이곳에서 밝고 또렷한 인사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지울 수 없는 각본이다. 고객에게 건네는 인사는 내가 맡은 바리스타라는 배역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그 인사를 누가, 몇 명이나 받아주었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아니다. 나와 동료들의 마음속에 상처로 선명하게 기록된다.
인사는 서로에게 향하는 첫걸음인 동시에 당신을 주체로 바라본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인사를 받지 않는 행동 앞에서 사람은 주체에서 대상으로 추락한다. 나의 인사가 공간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손님이 남기고 간 음료가 놓인 테이블, 종이 조각이 누워있는 의자, 커피 자국이 곳곳에 새겨진 벽지와 같은 배경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친절한 인사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든다는 약속은, 이 장치 안에서 신기루처럼 결코 붙잡히지 않는다. 인사에 대한 의무는 언제나 고객을 비껴가고, 내가 입은 유니폼에만 진하게 새겨져 있다.
오늘은 유난히 안 좋은 장면이 많은 날이다. 고객이 번거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건넨 몇 가지 질문에 호통을 치는 사람과, 고객의 계속되는 변덕에 당황해 작은 실수를 하나 했을 뿐인데 거센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을 이어서 상대한다. 그 탓에 속이, 바닥으로 내던져진 시럽병처럼 한순간에 ‘팡!’하고 깨져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만약 내가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타자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날 선 소리를 내뱉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찌푸리는 몸짓들을 쉽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여기는 고객과 종사자의 위계가 조명 아래 또렷이 떠오르는 상징적 무대다. 그 무대 위에서 고객의 무례함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연출처럼 묵인된다. 그들은 ‘여긴 내가 돈을 내는 곳’이라는 상징적 장면 안에서 나를 막 다뤄도 된다는 허가증이라도 받은 사람인 양 군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문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무대에서 바리스타를 연기하는 나는,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그저 “죄송합니다”라는 대사를 반복해야 한다. 내가 입은 유니폼을 벗고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다른 대사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유니폼이 원수의 목을 쥔 손처럼 내 숨통을 강하게 조른다. 유니폼만 벗어던지면 이 무대에서 곧장 내려올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 그 한 겹의 천이 천근만근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왜일까? 분명한 건 내가 받는 임금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아마 내가 던져 버린 책임을 대신 짊어질 동료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예의 없는 손님에게 욕을 흡수하는 스펀지이자, 불만을 처리해야 할 시스템의 작은 부품일 뿐이다. 이때 그들이 얻는 만족은 단순히 불만의 해소가 아니다. 상대의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잔인한 쾌감이다. 바닥을 향해 접히는 고개와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입안에서 망설이다 흘러나오는 사과의 반복은 그들에게 만족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들은 단지 상품만이 아니라, 타인을 굴복시킬 때의 쾌감까지 함께 소비하는 것이다.
내가 수치심에 몸을 떠는 이유는 고객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다. 내 안의 분노, 모욕감, 자기 존중 감각이 입에 떠오르지 못하고 한없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입 바깥으로는, 오직 무대가 내게 요구하는 대사(“죄송합니다.”)만이 흘러나온다. 이곳에서 겪는 굴욕과 수치심은, 말해진 것과 끝내 말해지지 못한 것 사이의 잔혹한 간극을 내 몸으로 메우고 있다는 지각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직원도 소중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왜냐하면 그 거짓을 덮기 위해 사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출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오늘 하루의 피로를 먼저 알아봐 주는 고객들. 그들은 먼저 밝게 인사를 해주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고, 작은 실수를 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는 기계가 아니라 하루를 버티는 한 사람이 된다. 메마른 자존감이 촉촉해지는 감각을 느낀다. 삶에 생기가 다시 돌기 시작하는 건 단순히 친절의 효과라기보다는, 그들이 나를 먼저 알아봐 주면서 내가 주체의 자리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이때 고객과 직원의 역할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전환된다. 그들이 있어서 잠깐이지만 바리스타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맑은 공기를 호흡한다.
하지만 이런 숨 쉴 틈이 있다는 사실이 이 무대가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가. 최소한의 예의와 상호 존중이 ‘감동적인 예외’로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음란한 현실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문장은 단지 구호가 아니라,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하나의 상징 질서를 구성한다. 이 문장 하나가 돈을 지불하는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분제를 그어 놓는다. 그래서 카페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단순히 ‘기분 나쁜 하루의 일들’이 아니다. 이 작은 공간이 우리의 몸짓과 말투, 표정과 목소리를 어디까지 점령할 수 있는지를, 매일 리허설 없는 공연처럼 반복해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