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앓을 열기

by 무명

밤이 깊어질수록, 집 안의 소리는 더 또렷해진다. 노트북이 얇게 떨리고, 음식물 처리 기계가 반복적으로 긁는 소리를 내고, 창문 앞에서 바람이 부서지며 무언의 말을 남긴다. 나는 그 소음들 틈에서 애써 한 가지 목소리만은 외면한다. 20대에는 나를 뒤흔들 만큼 또렷했으나, 30대의 안락에 길들여지며 이제는 희미해진 목소리. 그 안에는 내가 감당해야 했던 열망과 끝내 감당하지 못한 좌절이 짙게 배어 있다.


내 안에는 성별도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아이 하나가 산다. 그 아이가 언제 내 안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이를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다만 나는 아이를 방치하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 방치의 이름은 때에 따라 ‘현실’, ‘어른’, ‘가족’, ‘연인’ 등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이름들을 책임진다는 핑계로 책임에서 멀어졌다.


나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내게 내리는 하나의 명령이다. ‘그 나이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말이 내 일기장에서 윤슬 같은 단어들을 앗아갔다. 아니다. 사실 상징적 자리를 받아들이라는 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스스로 그것들을 내어주었다. 나는 사회가 정교하게 설계해 놓은 ‘나이’라는 서랍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삶의 통제권을 내어준 것이다. 그 결과, 평온의 껍데기만을 거머쥐기 위해 그 아이의 목소리를 유기한 대가로, 나는 이제 소음의 세계로 떨어져 헤매고 있다.


죄책감은 독감과 같다. 내가 처음 아이를 외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정신까지 타오르는 고열 속에서, 온몸의 감각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독감의 끝자락에서 면역력이 생겨나듯, 나의 정신도 이 가혹한 죄책감의 암호를 해독해 내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자기 합리화는 강력한 항체가 되어 통증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어쩔 수 없다”거나 “이것이 현실이다”라는 처방전이 들끓던 고열을 식히고, 비명을 고요한 무감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회가 설계한 ‘30대’라는 서랍 속에 안착하며 나는 평온을 얻었다고 최면을 걸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편안함은 회복의 증거가 아니라, 더 이상 아이의 울음소리에 반응하지 않게 된 감각의 퇴화일 뿐이다. 그것은 꿈을 포기한 사람이 누리는 게으른 평온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는 울지 않는다.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배워버린 탓이다. 대신 아이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어느 날은 예고 없이 어두운 방 안에 우울을 가득 채운다. 온몸에 차가운 납덩어리가 들어찬 듯이 중력의 무게가 나를 침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기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시간들이 이어지면서, 박제된 나비처럼 나는 바닥에 바싹 붙어 숨을 죽인다. 또 어느 날은 누군가의 눈동자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하얘진다. 그 눈동자 너머에서 유기된 아이의 죽은 눈빛을 엿보기 때문이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옷장 문 틈 사이의 어둠이 나를 응시한다는 느낌.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갑자기 옷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의 몸짓. 그 낯섦의 가장자리에 아이가 서 있는 것 같다. 바닥에 바싹 붙어 숨을 죽이고 있으면, 내 안의 아이는 이제 나를 넘어 담장 밖의 세계로 손을 뻗는다. 문득, 이 세상 어딘가에서 방치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의 고통이 개인적인 것인 줄 알았으나, 사실 이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고통을 소비하고 있다는 지각이 스친다.


오늘도 나는 카페에 출근한다. 카페에서 기계적으로 내리는 커피 한 잔의 검은 수면 위로, 어젯밤 나를 응시하던 옷장 속의 어둠이 겹쳐진다. 짙은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잠시나마 평온한 하루를 약속하는 찰나, 나의 시선은 검은 액체 너머 아주 먼 곳의 고원을 향한다. 그곳엔 아침 이슬에 젖은 빨간 커피 체리를 따기 위해 덤불 사이를 헤매는 작은 손들이 있다.


학교에 갈 시간에 바구니를 메고, 새순 같은 손가락으로 거친 나무줄기를 훑는 아이들. 아이들의 손톱 밑은 흙과 수액으로 검게 물들어 있다.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의 풍미 뒤에는, 아이들이 흘린 땀의 짠맛과 덜 자란 뼈마디가 삐걱거리며 내는, 소리 없는 비명이 숨어 있다. 퇴근 후에 커피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내 안의 아이와 그곳의 아이들이 입술 끝에서 만난다. ‘30대’라는 서랍 속에서 버티기 위해 들이키는 이 각성제가,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뿐인 유년의 시간을 통째로 갈아 넣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문득 나를 서늘하게 만든다. 나의 무뎌진 감각과 무기력한 평온이, 사실 이토록 선명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얻어낸 비겁한 전유물이라는 사실이 차갑게 와닿는다.


내가 죄책감을 독감처럼 앓으며 면역을 키워가는 동안, 저 멀리 다른 땅 위의 아이들은 독감 약 한 알 없이 맨몸으로 삶의 고열을 견디고 있다. 나의 무기력은 어쩌면 그들의 생존을 담보로 산 비겁한 휴식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나를 바닥에 박제시킨 변명이라는 핀을 하나씩 뽑아낸다. 그리고 다시 낯선 어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먼지 쌓인 구석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이의 손을 잡아본다.


이 아이의 손은 작고 가냘프지만, 동시에 이 세계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아이의 온기를 머금고 있다. 비록 완치될 수 없는 독감일지라도, 이제는 무감각이라는 항체 뒤로 숨지 않기로 한다. 기꺼이 앓아야 할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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