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홀의 가장자리에서
사람의 내부를 뜯어내어 제멋대로 조립하는 손길들이 있다. 그들은 숙련된 해부학자처럼 말의 칼날을 들고 타자의 내면에 달려든다. 그들에게 타자는 온전한 주체가 아닌, 자신의 안녕을 증명하기 위해 재배치되어야 할 부품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수술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표피들만이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다. 그곳은 순식간에 누군가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버린 존재의 허물들이 전시된 공간이다.
우리는 이 잔인한 전시회를 ‘정치’라 부른다. 카를 슈미트가 말한 대로, 정치가 적과 동지를 선명하게 구분 짓는 행위라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관계의 무조음악을 견뎌내기에 너무나 나약한 존재다. 내 안의 곪은 상처를 직면하는 대신, 그 고름을 타인의 살갗에 문질러 누구도 모르는 사이 혐오라는 문신을 새겨 넣는다.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음에도, 누군가를 발가벗겨 전시대 위에 올리고 그 결함을 조롱할 때, 집단은 악의적인 기쁨에 취한다. 타자의 추락을 양분 삼아 ‘우리’라는 성벽을 높이는 파티 속에서 나는 어떠했는가.
이 비겁한 축제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우리 존재의 한복판에 예고 없이 내려앉는 ‘거대한 싱크홀’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발밑이 언제든 꺼져버릴 수 있다는 근원적인 불안을 품고 산다. 나를 당당히 '나'라고 부르며 단단히 딛고 선 땅이 실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이라는 것. 불안은 바로 그 불온한 진실에서 솟아난다. 이 싱크홀이 언제 입을 벌려 나의 일상을 집어삼킬지 모른다. 그 어두운 구멍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신체가 조각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이 압도적인 불안을 견디지 못해 급히 타자의 살점을 약탈해 그 구멍을 메우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릿한 전시회장에서 기묘한 쾌락을 만끽한들 결코 우리에게 완벽한 안식은 주어지지 않는다. 타자의 표피를 뜯어낸 칼날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향해 메아리처럼 돌아오기 때문이다. 적을 상정하고 얻은 안도감의 이면에는, 언제든 나 또한 동지의 대열에서 이탈해 전시장의 작품이 될지 모른다는 편집증적 불안이 자라난다. 정치는 소속감이라는 가느다란 밧줄을 던져주지만, 그 끝은 언제나 불신의 늪에 닿아 있다. 결국 전시장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표피들만 쌓여가고, 수수께끼 같은 슬픈 눈동자들만 떠다닌다.
그러나 이 끔찍한 전시회의 가장 추악한 진실은, 나 또한 그 비릿한 칼날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함부로 뜯어 조립하는 자들을 향해 침을 뱉으며, 나는 어느새 그들처럼 그들을 재단하고 있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곤경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들을 ‘어리숙한 인간’이라는 틀에 가두어 박제하지 않았나. 그들의 폭력을 비난한다는 명분으로 나 역시 그들을 내 마음대로 조립하고 전시장 한구석에 몰아넣었으니, 나 또한 ‘해부학자’였다.
이제 나는 타인을 재단함으로써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했던 그 비겁한 순환을 멈추고, 타인의 살점으로 메우려 했던 내 안의 싱크홀, 그 공허 자체로 남고자 한다.
이 피비린내 나는 해부를 멈춘다. 타인을 심판함으로써 나의 정당성을 확인받으려 했던 그 정교한 방어기제를 내려놓는다. 나는 당신에게, 발밑에 입을 벌린 그 검은 싱크홀을 가만히 내보인다. 우리 모두가 훼손된 채로 세상에 던져졌다는 유일한 진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을 뜯어내지 않고, 당신의 심연 옆에 고통스럽게 침묵하며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스스로 선다. 그곳에서 고독하게, 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린다. 기약 없는 환대를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