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이 : 어른들을 위한 동화 (2)

[Two pack] 계묘년

by 일주일의 순이

주변 어른들은 항상 말했다. 늑대를 조심하라고. 토끼들을 물어뜯을 수 있는 존재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더럽게 농락하고 죽일 수 있다고.


토순이는 오랜 공부를 마치고 가장 유명한 신선 당근 농장에 입사할 수 있었다. 친구들도, 머리가 좋은 후배들도 벌써 입사하고 난 뒤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여러 동생들의 눈치를 보며 나 하나를 위해 공부를 지원해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토순이는 하루라도 더 빠르게 당근관리토끼가 되고 싶었다.


“토순씨, 오늘 저녁에 뭐해? 우리 친목도모를 위해 밤주 한 잔 하러갈까?”

친목도모도 업무의 일부이다. 저 집단 사이에 끼어야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다. 토순이는 잦은 회식자리에도 군말없이 끼었고, 그렇게 부장토끼의 눈에 들 수 있었다. 부장토끼는 새끼토끼 토동이를 늘 데리고 나왔다. 남편토끼가 주말에만 돌아온다고 했다.

“토춘부장님, 제가 토동이랑 놀고 있을게요. 기분 좋게 마시세요.”

눈치가 빠른 토순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른 토끼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서로 부대끼며 얻은 능력이랄까.

“토연언니, 이번 당근 분류 파일 제가 도울게요.”

토순이가 거의 다 작성한 파일은 동료선배 토연이의 이름으로 결재를 받았다.

“토정아, 오늘 저녁에 혼자 밥먹기 싫어서 그런데 같이 저녁 먹으면서 일 도와줄게.”

일부러 초과 근무를 하면서 회사의 정보통이라고 불리는 토정이의 수다도 들어주었다.


그렇게 토순이는 신선농장의 메인그룹에 낄 수 있었고, 부당한 일을 말없이 도왔지만 부정한 이득도 챙기게 되었다.

“토순씨, 이번에 당근주스 새로 만드는 일 말이야. 그거 나랑 둘이 할 수 있게 내가 이름 올려줄게.”

“어머 토춘부장님, 고마워요. 오늘 저녁에 토동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갈까요?”

“그래서 말인데, 두 시간 정도만 토동이 좀 봐주라. 오늘 저녁에 농장관리토끼들 술 자리에 가게 되었어. 다음에 토순이도 데려가줄게. 중요한 자리에 꽂힐 수 있을 것 같아.”

토순이는 두 시간, 세 시간… 밤 늦게까지 토동이를 봐주었고, 토춘부장은 밤주에 취해 돌아왔다. 그러고는 묘한 이야기를 했다.

“토순아, 너도 조심해. 절대 가까이는 하지 마.”

토순이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농장관리토끼가 늑대구나.


농장관리토끼들의 모임은 사적인 연락으로 이루어졌다.

“토순아, 오늘이야. 3번 토끼굴로 와.”

토춘부장의 연락을 받고 토순이는, 솔직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모임에 낄 수 있다니. 농장관리토끼 그룹에 들어갈 수있다는 것은 토순이에게 맡겨질 중요한 일들과 그 뒤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눈 앞에 그려지는 빛나는 미래에, 잠시의 두려움은 빛을 잃어갔다.


밤주가 오고 가는 자리에서 만난 관리토끼들은 토순이와 똑같은 토끼였다. 늑대인줄 알고 지레 겁먹었던 것이 무안할만큼. 눈치 빠르고 싹싹한 토순에게는 다른 토끼의 마음에 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잔이 비지 않게 밤주를 채웠고, 얘기가 끊기지 않게 적재적소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준비해온 토순이의 능력을 티나지 않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관리직의 자리에 오른 토끼의 눈에도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토순은 부리기 쉬운 수하였다. 그 다음 번 자리에서도,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하지만 토춘부장은 서너 번의 참석 이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기 승진이라는 말은 참 달콤했다. 토순이의 이름을 모르는 후배 토끼가 없었다.

“저 언니가 이번에 3농장 부관리인으로 왔대. 저 구역을 다 관리 한다나봐.”

토순은 이른 나이에 이룬 성과가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열심히 산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모두가 토순을 보며 능력이 있다, 잘 나간다고 말했다. 그것은 참 빛이 나는 모습이었다. 어둡고 썩어가는 그 이면의 모습은 토순만 알고 있었다.


“토순이, 등산가게 나와. 내 차로 가자고.”

“아… 그런데 내일 조금 이른 시간에 가면 어떨까요? 지금은 금방 해가 저물 것 같아요.”

“등산을 산 타러만 가나? 내려와서 밤주 한 잔 하게. 얼른 나와.”

“그러면 토춘부장님도 같이 갈까요? 산 좋아하시는데요.”

“무슨 소리야? 오늘은 시간이 길지 않으니 둘이서만 얼른 다녀오자구.”

토순은 토철관리인의 말에 거절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토철은 3농장 주관리인 토끼였다.

“토순이, 우리 손잡고 갈까? 내가 좀 힘이 드네.”

“네? 아… 힘드시면… 내려가실까요?”

“아니, 저기 좀 앉아서 쉴까? 좀 쌀쌀하지? 내가 안아 줄께. 이 쪽으로 와봐.”

토순은 토철의 이러한 요구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이후의 상황도 불 보듯 뻔했다. 밤주를 많이 마셨다며 운전을 못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조금만 쉬고나서 가겠다며 작은 굴에가서 자고 가자고 말할 것이다. 싫다고 말하면 차에서 자고 간다고 할 것이다. 그 이후는…


토순에게 이런 토끼는 토철뿐만이 아니었다. 2농장의 관리토끼도, 5농장의 관리토끼도 틈만 나면 토순에게 이런 식의 연락을 걸어왔다. 그런데 토순은 2농장의 새로운 당근주스 일도, 5농장의 당근 분류작업도 관리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는 터라 단호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토순은 다른 토끼가 보기에 성공한 토끼였지만 마음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어떤 늑대들보다 같은 토끼가 더욱 무서웠다.

“토춘부장님… 저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것 같아요. 사실은 토철관리토끼가요…”

가장 토순의 편이 되어줄 줄 알았던 토춘부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니가 몸으로 비벼서 그 관리직을 다 얻은 거라구?”


소문은 무섭게 퍼져 나갔다. 토춘부장의 질투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 토순 부관리토끼가 5관리토끼를 먼저 꼬시고 그랬다며?”

“그래서 그 농장 분류관리까지 오른 거였네.”

“일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매번 자기 베끼기 수준으로 얻어낸 자료더라.”

“우리 농장 토철관리토끼도 절대 그럴 분이 아니야. 누가 등산 가는데 옷을 토순 부관리처럼 야하게 입고 가겠어? 다른 마음이 있었던거지. 나중에 자기가 먼저 취해서 차에 누웠대.”

신선농장 메인그룹의 토끼들이 이야기를 잘 찧어냈다. 토순이는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슬펐던 것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토끼들도 그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이었고, 믿지 않아도 그 소문의 전파에 큰 기여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생활에 친구는 없었다.


인생의 삼대 불행이 있다면 초년출세, 중년상처, 말년무전이라 했던가. 초년출세는 모든 이들의 시기어린 눈빛을 받는 자리였다. 자신을 지켜낼 힘도 없는 어린 나이에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멀리 있는 늑대가 아니라, 내 주변의 토끼들이었음을 토순은 더럽게, 처절하게 깨달았다. 감당하지 못할 높은 자리는 토순이 앉아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것이 토순은 본인의 노력이라고, 치열하게 산 세월이라고 생각했을지언정, 올바른 길을 열심히 걸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걸을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가야할 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무지함이 후회스러웠다.


손에 쥔 것이 많아서 다 내려놓고 농장을 나가기에도 토순은 속이 쓰렸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을 포기할 때와, 비록 훔친 것이건, 뺏은 것이건 가지고 있던 것을 포기하는 심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토순을 뒤에서 응큼하게 탐냈던 토끼관리인들은 견고하게 본인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더러움을 알리는 방법이 고발의 방식이었다면 저들과 함께 무너질 수 있었을까.


신선농장을 나온 토순은 이름없는 어느 농장을 일시적으로 계속 떠돌며 지냈다. 하루의 대부분을 눈에 띄지 않게 지냈다. 누군가 토순의 이름과 얼굴을 알까봐, 과거를 떠올릴까봐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추운 날, 일하는 농장의 토끼들의 수근대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의 주인공은 토철 관리토끼. 젊은 직원 토끼를 차 안에서 겁탈하려다가 고발되어 쫓겨났다고 한다. 썩은 열매는 저절로 떨어지는 법이었다.

토순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길을 걸은 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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