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순이 : 낯선 곳에서 만난 나(2)
나도 모국어가 세계 공용어였으면...
“두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할까요?”
“바이링구얼(Bilingual)이요.”
“세 개 이상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뭐라고 부를까요?”
“멀티링구얼(multilingual)이요.”
“그럼 한가지 언어만 하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모노링구얼(monolingual)이요?”
“하나의 언어만 하는 사람은 아메리칸(American)입니다.”
어떤 미국인의 농담이었다.
나에게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다가왔다.
미국 사람들은 본인들의 모국어가 세계 공용어라서 다른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고 다른 나라를 가도 모국어인 영어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심지어 영어권 국가가 아닌 곳에서도 영어로 이야기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간절하게 절박하게 굳이 다른 언어를 따로 배울 필요성을 못 느끼는 미국인들이 참 부럽다.
모국어인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여서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이야기해도 되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모두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내가 말하는 한국어를 알아들으려고 귀담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이 순간 그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모국어로 어디서나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정말 편할 것 같고 생각만 해도 즐거운 상상이다.
이전에 미국이나 영어권 국가로 여행을 가거나 한 달 정도 짧게 연수를 다녀온 적은 있지만, 미국에서 몇 달간 일상생활을 사는 것은 처음이다. 이제 다섯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거주하는 것은 여행과는 느낌이 완전 달랐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고 여행은 관광과 휴식, 쇼핑 등이 위주이므로 영어를 못해도 크게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내 아이의 학교와 선생님과, 친구들과 부모님들과 영어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고, 때로는 이웃들과도 영어로 교류하고, 은행 업무나 통신 등 생활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많은 일들을 모두 다 영어로 처리해야 한다. 영어의 무게감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TV나 라디오를 트는 순간, 집중하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서 무슨 말인지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 바깥에서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있는 곳에서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하는 말도, 내가 집중하지 않아도 공중에 흘러다니는 소리가 나에게 와서 다 들리고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분명히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나를 보면서 나에게 이야기하고 나는 집중하고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는다. 그저 소리일 뿐 언어로써 그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과 소통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게다가 잘 들리지 않는 영어를 몇 시간동안 계속 집중해서 들어야하는 상황이 되면 긴장이 되었는지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나의 느낌은 미드 속 입체적인 세트장 안에 실제로 내가 들어와 있고, 낯선 외모와 낯선 언어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베테랑 배우처럼 대사와 연기를 잘 하는데 나는 드라마 세트장의 구석진 어딘가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다’라는 관용어 표현이 이렇게 실감나는 것은 처음이다.
대학생 때까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때는 영어 논문도 읽었는데.. 그 후로는 평소 삶 속에서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고, 영어를 하지 않아도 불편한 일이 전혀 없고 오랜 시간동안 영어를 손에서 놓았더니 그것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영어가 이렇게 말이 안 들리고 간단한 대화도 영어로 말이 안 떨어지다니.. 정말 너무나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국어인 한국어는 잘 듣고 잘 말할 수 있는데!!
지역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의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과정에 등록했다. 영어 테스트를 해서 테스트 결과에 따라 ESL 수업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쉬운 수업 과정이 있어서 신청해서 영어 테스트를 보았다. 오마이갓! 테스트는 하필 영어 Reading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내가 reading 테스트에서 만점 받은 것이다! 나에게 Perfect score라고 했다!!
반전은 영어 테스트 만점이라서 무료로 하는 쉬운 과정을 들을 수 없고, 그것보다 ESL에서 상위 과정인 유료 수업을 들으라고 했다. 그런데 만점을 받으면 기뻐야하는데, 리스닝과 스피킹은 ESL의 하위 과정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 리딩과의 갭이 커서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뭐랄까 한때는 영어공부 좀 했지만, 매우 간단한 회화조차 입에서 잘 나오지 않다니.. 언어발달 시기에 영어를 언어습득이 아닌 학습으로 공부한 세대의 영어 공부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영어 때문에 매일 너무 괴로운 나와는 달리, 초등학생 아이는 영어로 많이 말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새로운 곳이라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이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며 바로 친구를 사귀었다.
아이가 영어를 배운 과정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요즘 어린이들은 인터넷과 매체의 발달로 인해 영어로 된 컨텐츠를 아주 어릴 때부터 쉽게 접하고 언어로서 영어에 훨씬 더 많이 노출이 되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울 때부터 한글과 얼추 비슷한 수준부터 시작해서 영어책을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영어 교육환경이나 각종 동영상 매체 등 인프라의 발달로 인해 언어발달의 결정적 시기인 어린 시절부터 외국어인 영어를 마치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비슷하게 언어로서 습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졌다. 영어환경에 노출되는 나이도 훨씬 더 어려졌고, 영어를 학습이 아닌 어릴 때부터 언어로서 습득해서인지 요즘은 영어를 자연스럽게 잘하는 어린이들이 정말 많다. 그들이 참 부럽다.
나도 모국어가 세계 공용어라서 어디서나 모국어로 자유롭게 의소소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정말 좋겠지만, 그것은 신나고 즐거운 머릿 속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는 세계 공용어의 영어의 벽을 넘고 영어와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다. 영어의 중요성은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미 언어발달의 결정적 시기가 지났을 뿐더러, 마흔이 넘어서 언어 습득 능력이 뚝뚝 떨어지고 영어를 단기간에 능숙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영어를 조금 더 언어로서 습득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할 것이다.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여기서부터 힘을 내자!
그리고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미국인들에 비하면 모국어인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를 약간이라도 할 수 있는 내가 얼마나 대견한가!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책하지 말자.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니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