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순이 : 캐나다 5년 살이 (2)

캐나다에 처음 살러 간 날, 내가 만난 캐나다.

by 일주일의 순이


캐나다 5년 살이에 대한 기억을 되돌아 보면 아주 작은 기억들이 모자이크처럼 타다다닥 머리속에 떠오른다. 나이 듦과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효울적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무던히도 노력하며 사는 요새 지난 일에 대한 기억이 선명치 않다. 캐나다에서 내가 살았던 5년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연속적인 기억이 흐르듯 생각나지 않는다. 순간적인 이미지가 흐릿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금새 사라지거나, 드라마 1부가 끝나고 2부가 방송되기 중간에 나오는 짤막한 광고나, 한편의 드라마가 끝나고, 맨 마지막에 주요 장면만 편집된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같이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상황들이 떠오를 뿐이다.



‘캐나다’에서의 5년을 생각하면, 가장 선명한 기억은 처음에 공항에 도착했던 날과 내가 이사간 도시의 영하 28도의 밤 공기를 코로 들이 마셨을때의 그 차가움에 놀랐던 순간이다. 비행기로 캐나다에 들어가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비자를 종이로 발급하기 위해 보더 서비스 에이전씨(Canada Border Services Agency)에 도착했다. 이미 공식적인 입국 허가는 받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에 입국했다. 하지만, 입국해서 캐나다에 머물러도 좋다는 공식 허가에 해당하는 증명서를 보더 서비스 에이전씨 공무원들이 종이로 출력을 해서 나의 한국 여권에 붙여주어야 나는 캐나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상태가 된다. 그 에이전씨 오피스에 들어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을 보고, 과연 이 모든 사람들의 수속이 끝나려면 몇시간이 걸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의 캐나다로의 비행이후 만난 합법적 체류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기다란 줄.



https://www.cbsa-asfc.gc.ca/menu-eng.html
보더 서비스 에이전씨 공무원들의 제복, 출처: 트위터



캐나다에 들어갔던 날은 2017년 12월의 끄트머리였다. 이사가기로 한 도시의 그날 기온은 영하 28도. 추웠기에 옷은 벙벙하고 두꺼웠다. 국제 이사와 장기 비행으로 피곤하고 지친 몸에 둔한 옷차림으로 보더 서비스 에이전씨의 길고 긴 줄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았다. 겨우 힘든 몸을 슬쩍 의지하면서 의자 끝에 걸터 앉았는데, 아이가 화장실이 급하단다. 나는 당시 4살의 아이가 있는 임산부였다. 나를 담당 했던 산부인과 의사의 동의서를 받아야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정도의 만삭이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제복 스러운 옷을 입은 누군가에게 화장실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Where is the restroom? (화장실이 어디에요?)”

“Washroom is over there. (화장실은 저쪽에 있어요.)”

“Restroom? (화장실?) “

“Yes, washroom. (응. 화장실)”



화장실을 표현하는 단어가 미국과 다른 것을 보고, 캐나다에 온 것을 느꼈다. Washroom은 나에게 생수한 단어였다. 처음에 몇달은 나도 모르게 Restroom이 어딘지 물었던 것 같다. 그러다, 몇개월 사이에 미국가서 Washroom이 어딘지 묻는 상태로 변하기는 했지만.


캐나다의 화장실 마크(왼쪽), 미국의 화장실 마크(오른쪽)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려면 두꺼운 자켓류의 겉옷은 다 벗어야 했다. 한국의 많은 공공 화장실들은 아이와 함께 가는 가족용이나 장애우들을 위한 화장실이 아닌 이상 어린 아이를 데리고 만삭의 임산부가 겨울에 두꺼운 옷을 입고 들어 가기에는 비좁은 감이 있었기에, 아이가 화장실에 가자고 하면 모든 자켓류를 벗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었다. 나는 자켓을 벗고, 등과 허리를 펴고 뭉친 배를 문질렀다. 이는 만삭의 임산부들이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하는 그냥 일상적인 행동이다. 나도 반사적으로, 습과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러면서 내 불록한 배가 드러났나보다. 내가 아이와 함께 화장실에 다녀오고, 갑자기 제복스러운 옷을 입은, 나에게 화장실을 안내해준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Are you pregnant? (임산부이신가요?)”

“Yes. (네)”

대답을 한 후, 직원이 말했다.

“You don’t need to wait. Go and process first. (줄 서실 필요 없어요. 가서 수속 먼저 밟으세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가장 먼저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너무 어리둥절한 대우였다. 이유는 내가 임산부에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라서 룸에 한가득 차서 줄서 있던 사람들을 뒤로 한채 먼저 수속을 밟게 되었다.




나는 이 경험이 조금은 놀라웠다. 내가 임산부라고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은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임신 기간에도 시댁에 가서는 며느리 역할을 하느라 유산기도 있는 상태에서 배도 불룩하고 허리도 당기는 몸으로 설거지를 했다. 시댁 식구들은 나의 임신 사실과 유산기에 대해 알았지만, 내가 그런 몸으로 시댁에서 설거지하는 것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임신 사실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첫째를 출산하기 전에 두번의 유산을 했다. 둘째 임신때도 유산에 대한 두려움과 조마조마한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 유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 임신 사실은 출산 전까지 꼭꼭 비밀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렸던 지인들에게 유산 사실을 알리는 일이 나는 어려웠었다. 그래서, 둘째 출산 전까지 대부분의 지인들에게 일부러 연락해서 나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매일 얼굴을 보는 이들이더라도,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거나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풍성한 옷을 입고 배를 가리고 다녔다. 어쩌면 그랬기에 임산부에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인들 뿐만 아니라 내가 임신을 했다고 가정내에서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 혹은 친정 식구들에게 조차도 다른 대우를 받은 기억은 특별히 없었다.



나는 보통의 한국의 임산부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모른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임산부가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다정한 남편은 그 음식을 구해다 가져다 준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나는 첫번째 임신은 해외에서 했었고, 당시에 내가 무언가 먹고 싶을때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늘 한결같이 말했다. “여기 그거 안팔아. 차 타고 한시간 가야하는데, 지금은 갈수가 없어.”



운좋게도 두번째 임신의 대부분의 기간은 한국에 있었다. 무언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혼자 먹으러 갔다. 그것만으로도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입덧 심하고 유산기 있는 내가 만들어 먹지 않아도 되었기에.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임산부라서 받는 그런 대우를 가족들에게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영화나 드라마이기 때문에 임산부들이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병원도 혼자갔고, 임신한 상태로 아이를 혼자 돌봤고, 심지어 만삭에 이삿짐도 혼자 다 풀었다. 그런 환경 속에 살던 나에게, 내가 전혀 모르는 이들만 사는 나라에서 처음 겪었던 이 경험. 임산부이며 어린 아이가 있기에 공공기관에서 일을 빨리 처리해주었던 이 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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