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순이 : 서점 여행자 (2)

스모크 프로젝트

by 일주일의 순이



."그래, 똑같은 장소만 4천 장을 찍었지. 7번가와 3번가의 모퉁이를, 매일 오전 8시에 찍어 온 거지. 날씨야 어떻든 4000일 동안 찍었어."

ㅡ 영화 스모크(1995년) 오기 렌의 대사 중에서


남산 밑 해방촌으로 가는 언덕길 중간쯤 삐그덕거리는 낡은 샤시문이 인상적인 작은 서점이 있다. 이곳은 사진 관련 독립출판물이 많고 그리고 사진작품으로 책 만드는 프로그램이 유명하다. 몇 년 전 새 학기가 시작될 때쯤 초보자도 참여 가능하다는 sns 공지글을 보고 참가신청을 했다. 서점지기는 첫날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때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스모크’는 긴 세월 담배가게 앞 같은 자리에서 주변 풍경 사진을 찍는 오기 렌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왜 같은 사진만 찍냐고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언젠가 주인공처럼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시간이 주는 변화를 잡아보고 싶었다. 내 이야기에 서점지기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한번 해보라고 했다. 어디를 찍을까 생각하다 교실 밖 나무가 떠올랐다. 처음 1학년 담임을 할 때는 천방지축 아이들을 보느라 바깥 풍경을 볼 시간이 없었다. 한번 더 같은 학년을 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같은 교실을 사용하면서 창 밖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3월 아침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한 다음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일 년 넘게 봤던 나무인데 낯설게 보였다.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어디를 보며 살았을까? '

계속 보다 보니 한 나무에 눈이 갔다 앙상한 가지가 멋스럽게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출근 시간은 빨라졌다. 아이들이 오면 사진 찍을 겨를이 없어 30분 일찍 나왔다. 8시 정각 교실 뒤 두 번째 창문을 열고 나무를 찍었다. 그 뒤로 계속 같은 창문에서 찍었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나만 아는 일이라 생각하니 설렜다.


아기 연두 같은 새 순이 나오고 그것들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봄의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잎이 커졌다. 나무가 가진 모든 힘을 가지로 보내는 것 같았다. 잎이 자라는 과정을 꾸준히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무가 초록잎으로 풍성해지자 아이들과 같이 보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주자고 했다. 나무 동화책도 읽어 주고 나무를 관찰하고 그림 그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나무에게 말을 건넸다. 나뭇가지 위에 앉은 참새떼처럼 재잘거렸다.


초여름이 되자 사진 찍기가 시들해졌다. 짙어진 초록잎은 더 이상 변화도 없이 늘 똑같아 보였다. 이걸 계속 찍어서 무엇할 것인가 그리고 이만큼 찍었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폴더에 정리했다. 하나하나 다시 보니 나무 밑 운동기구에 할아버지가 보였다. 어떤 날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시거나 줄넘기를 하셨다. 출근하는 아가씨는 옷이 매일 바뀌었다. 어느 날은 화려한 스커트가 눈에 띄었다. 나무만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밑을 지나가는 사람도 같이 찍혔다.

'같은 장소라도 매일 똑같은 사진은 없어. 바람, 공기, 사람 미묘하게 다르지.'

영화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났다.

다음날 나는 다시 사진기를 들었다.


가을이 되자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한 듯 나무는 진주 홍색으로 발그레했다. 퇴근길 같은 학년 선생님들과 걸어가다 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 자식 칭찬하는 것 같네."

" 선생님도 나무 좋아하는 거 보니 나이가 드나 봐요. "

어릴 때 엄마가 걷다가 나무와 꽃을 보고 예쁘지 않냐 할 때 나는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의 엄마보다 더 어른이 된 나는 나무들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현관 앞 보도블록 사이에 난 작은 들꽃을 살펴보는 사람. 나무의 변화를 아는 게 나이 드는 것이라면 제법 괜찮은 느낌이었다.


하얀 눈이 내리고 나뭇잎도 다 떨어졌다. 학교를 옮기는 해라 교실 짐을 정리했다 교실을 나서면서 나무에게 인사를 건넸다. 결국 사진책은 만들지 못했다. 서점지기는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사진에 비해 소박했던 내 사진을 보고 다음을 기약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1년간의 스모크 프로젝트는 끝이 났지만 나무와 나만 아는 추억이 생겼기 때문이다.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에서 대림 방향으로 가게 되면 내가 근무한 학교를 찾아본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그 사이 우리는 한 뼘쯤 더 자랐을까. 성실하게 자리를 지키는 나무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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