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순이 : 서점 여행자 (1)

미역국과 그림책

by 일주일의 순이


"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찌그러진 아이스박스 안에는 소고기가 잔뜩 든 미역국이 꽝꽝 얼려 있었다. 멸치조림, 제육볶음, 직접 빚은 김치만두. 딸이 좋아하는 것을 골고루 싸서 보낸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에 또 화를 내고 말았다. 미역국 때문이다. 미역을 보면 목구멍 속이 미끄덩거린다. 삼키지 못한 기억 한줄기가 따라 올라와서이다.


등대가 있는 방파제, 오징어배들이 모여있는 작은 항구 그리고 바닷가 옆을 점령한 조선소가 있는 곳에서 자랐다. 농사를 짓던 젊은 아빠는 용접을 배웠고 배를 고치는 곳에 나갔다. 엄마는 집주인 아줌마 소개로 선장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미역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햇볕이 들지 않는 후미진 창고방에서 동생이랑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런 날이었다.


어느 날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선장 집으로 오라고 했다. 몇 번 따라서 근처에 가 본 적은 있어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선장 집은 자갈돌이 깨알같이 박힌 조그마한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여섯 살 동생을 데려가던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파란 대문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미역을 자르고 그물망에 옮기기 바빴다. 동생 손을 꽉 잡고 서서 엄마를 찾았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우리를 불렀다.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왜 집에 있지 왔냐며 큰 소리를 내고 눈을 부라렸다. 분명 아침에 오라고 한 엄마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미역을 나르기 시작했다. 나는 울 듯 말 듯 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엄마는 눈을 찡긋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엄마가 일하는 곳은 배가 여러 채 있어서 선장 집이라 불렸다. 주방에는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커다란 솥에는 국이 끓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작은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방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가 책을 보고 있었다. 알록달록 그림이 가득한 책이었다. 동생이 옆에 있는 다른 책을 건드리자 아이는 싱긋 웃으며 같이 보자고 했다. 그녀는 조용하고 상냥했다. 환하고 따뜻한 방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스산해서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불러서 나가니 상에는 생선전, 잡채, 소고기 미역국 그리고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손녀 생일이라 했다. 같이 밥을 먹던 아줌마들은 어떻게 잔치 날인 줄 알고 애들이 왔을까라며 비릿하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엄마는 국에 밥을 말아 동생에게 먹였다. 가슴에 쌉쌀한 파도가 치는 듯했다. 저녁까지 뱃속에 음식이 멈추어 있었다. 선장 집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가끔 책이 있던 밝은 방 속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그곳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책을 사달라고 졸랐지만 오랫동안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역국을 냉동실에 넣으며 거실을 바라봤다.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은 책들로 빵빵해서 터질 듯하다. 그리고 바닥에는 책이 지층처럼 쌓여 있다. 서울 곳곳 책방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것이다. 서점에 가면 허기가 느껴지고 이것저것 잔뜩 집어 들게 된다. 그런 모습에 남편은 다 읽기는 하냐고 핀잔을 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 표지를 쓰다듬고 그림책을 꺼내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한다. 작은 책방에 앉아 있는 이 순간, 책이 고팠던 어린아이에게 속삭여주고 싶다. 넌 커서 서점을 여행하며 책 부자가 되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