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
제가 처음에 돈을 주제로 해방일지를 써볼까 생각했을 때 떠오른 여러가지 일들이 이제 어느정도 정리가 된 거 같아요. 돈에 대한 저의 마음을 돌아보니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 쓰는 거 만큼은 많이 너그러워졌거든요. 이게 좋은건지는 확신이 가지 않지만요.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보니 결혼이 기점이 되는 거 같아요. 결혼이 제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인생의 큰 숙제 하나를 해결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어쨌든 돈에 있어서 만큼 결혼 비용은 제 젊은 날들에 가졌던 마음의 큰 짐이었거든요. 사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결혼 비용은 독립 비용이었죠. 현명했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독립을 선택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ㅎㅎ
근데 솔직히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남편이라고 제가 저한테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기도 해요. 저희 남편도 정말 어렵게 살아서 돈 아낄 줄 아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저와는 달리 써야 할 데는 확실하게 쓰는 편이에요. 마음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도 저보다 훨씬 더 마음이 크더라고요. 물론 그 마음 속에는 그만의 컴플렉스가 있을거라 생각해요. 결핍은 숨길 수 없는 거 같거든요. 그래도 어찌됐든 저는 그런 남편과 만나 살다보니 저한테 쓰는 거 만큼은 너그러워지게 됐어요. 만약에 남편이 자기한테 돈을 잘 쓰는 남자였거나 제게도 자신의 소비 기준을 강요했다면 저는 더 아껴사느라 제게도 돈을 잘 못 썼을 거 같아요. 제 스스로에게도 더 인색하게 굴었을 거 같아요.
근데 문제는 여전히 있어요. 저한테만 너그러운 편이거든요. 이런 것도 엄마를 닮아서 그런걸까요. 저희 엄마가 그렇게 아끼며 사시고 제게 인색하게 굴었을 때도 엄마가 본인 화장품은 가장 비싼 브랜드걸 사셨거든요? 이게 참 알게 모르게 원망스러웠던 건지 이렇게 기억에 남아 결국 여기에 말하고 있네요. 저희 엄마가 아시면 너무 서운해 하실 내용인데...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털어버릴래요. 해방일지니까요.
엄마에게 화장품은 포기할 수 없는 본인을 위한 그 무엇이었던거예요. 하지만 백화점 매장에서 직접 턱 하고 사오시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늘 면세점 면세점 면세점, 아니면 알음알음 뒤로 빼와 파는 화장품들을 사셨죠. 저도 비슷한 거 같아요. 다른건 아껴써도 제게 있어 그 어떤 무언가에는 너그럽게 쓰는 편인거죠. 그렇게 돈을 쓸 때도 저는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갖고 싶은 건데 그것도 못 사고 살면서 어떻게 남을 위해 베푸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어? 그러니 나를 위해 내가 갖고 싶어하는건 사주자' 하고요. 이게 무슨 어이없는 소리인지. 그래도 제게 일종의 주문 같은 역할을 해요. '너, 이렇게 네가 사고 싶은걸 샀다. 그러니 더 너그러워지자.'
주문이 잘 먹히냐고요? 아직 멀었죠. 그렇게 자본주의의 노예로 제 욕망의 굴레에 갇히고 말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이상하게 저를 위한 소비가 종종 제게 위로가 되기도 해요.
나중에 아이들이 봤을 때 저도 저희 엄마와 같은 모습으로 기억될까요? 그러면 안될텐데요. 그래서 해방일지를 적고 있는 거겠죠?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기 힘든 돈의 굴레에 해방될 자신은 없지만 중요한 게 무엇인지 놓치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힘이요. 나를 계속 돌아보고 내 안의 욕망을 확인하는 일. 그게 시작일거라 생각해요. 늘 시작만 하고 있어 문제지만 저라는 주전자는 엄청 큰가보죠 뭐. 물이 끓는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큰 주전자요.
# 돈에게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제 해방일지를 마치려고 해요. 마무리를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시간이 걸렸어요. 해방되려고 쓰기 시작했으니 해방되고 마무리하면 제일 좋을 텐데요. 아쉽지만 돈에서 해방되는 일은 제게 어려운 일 같아요.
근데요, 제가 이 해방일지 쓰기 시작한 게 드라마 영향이 컸잖아요? 그래서 그 드라마에 나온 대사 중에 제 마음을 건드려 기억해 둔 대사가 있는데 그걸로 마무리하려고요.
추앙하라는 미정에게 추앙하고 나면 뭐가 변하냐고 구씨가 물었을 때 미정이가 했던 답변이었을 거예요.
"한 번도 안 해봤던 걸 하고 나면 나는 그 전하고 다른 사람이 돼있던데.."
이때도 유레카 같은 마음으로 이 대사가 제 마음에 들어와 적어놨었는데 이렇게 해방일지 마무리도 미정의 대사로 하게 됐네요.
내가 돈에 얼마나 얽매여 있었는지 돈에 대한 저의 기억과 마음들을 정리해 본 저는 그렇지 않았던 저와 다른 사람인 거잖아요? 그걸로 만족하려고요. 꽁하게 담아뒀던 돈과 관련된 상처들, 기억들도 이렇게 글로써 밖에 내놓으니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느낌도 들고요. 제가 앞으로 돈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도 어렴풋이 생각하게 됐어요.
얼마 전 글에도 썼듯이 저는 제 몸에 문신을 새기듯 살고 싶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돈 앞에서 주저하는 일은 좀 줄여보려고요. (돈 걱정은 안 하겠다고 못하겠어요! ㅎㅎ) 돈이 더 이상 제 발목을 잡지 않게, 제가 더 이상 돈이라는 방패막이 안에 숨지 않게요.
그리고 저에게만 너그러워질 게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좀 더 너그러워지려고요.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도 계산기 두드리는 일을 좀 줄여보고요. 주저하는 마음도 용기를 내는 마음으로 바꿔보도록 노력해 보려고요.
아, 근데 역시나 이렇게 다짐을 글로 쓰는데도 과연? 정말?이라는 두려운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 마음을 붙잡아버리네요. 한 번에 잘 바뀌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래도 제가 기특해요. 어쨌든 이렇게 해방일지 끝도 냈고요 나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용기 내서 썼잖아요? 물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덕분이라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정말이에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면 끝을 내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이제 정말이지 마지막으로 돈에게 부치는 편지로 진짜 끝을 내야겠어요.
돈아, 나는 따듯한 집에서 부모님 슬하에 큰 시련 없이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심리적 압박 속에 살아왔어.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게 질병과 가난이야. 그래서 너를 어떻게든 움켜쥐며 살고 싶었어. 지금도 그렇긴 해.
근데, 이제는 너에게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어. 내 마음을 위해 너를 써보려고. 그리고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들한테도.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너에게 얽매여 구속했던 나의 마음들을 잘 살펴 보기를, 그 안에 숨겨진 나의 욕망과 진짜 마음을 알아챌 수 있기를, 내가 너와 함께 노년을 잘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해방일지를 너에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