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순이 : 거울을 바라보는 시간(2)
방학은 과연 '과유불급'의 시간인가
주말에 하루 이틀 쉬는 때에는 휴일이 더없이 반갑고 소중하였는데, 한 달 안 되는 기간이 나에게 주어지자 어느덧 이 시간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나만의 나태함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주변 선생님들을 보면 알찬 방학을 위해 여행이나 여러 가지 연수 등 자기 연찬의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기도 했다. 또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며 소중한 시간들로 방학 기간을 채워가고 있는 듯 보였다. 이처럼 방학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많은 이들과 달리, 내게 방학은 막연한 '판타지'같은 것이었다. 복직 후 좌충우돌 막막한 시간을 보내며 막연히 바라고 원한 탈출의 시간이었을 뿐, 막상 이 시간이 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거나 채울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방학은 생각보다 빨리 덜컥, 와 버렸다.
그렇게 방학이 되자 나는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1주일 간의 가족 휴가를 다녀왔고, 또다시 그다지 의미 없이 방학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도 괜찮은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들로 소중한 방학 기간을 낭비함으로써 느끼는 죄책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생기 없이 반복되는 매일을 살아내고 있는 이가 화장실 문에서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라는 메시지를 읽어낼 때의 심정이랄까. 맞다, 나에게도 분명 소중한 방학일 텐데, 왜 나는 바라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매일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느낌인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유불급의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러한 듯하다.
학기 중, 매일 이른 시간에 도우미 이모님께 아이들을 맡기고서 집을 나설 때마다 '방학이 되면 꼭 아이들과 함께 하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리라'하고 다짐했었다. 그 말은 워킹맘으로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 위로의 주문과도 같았고, 그랬기에 방학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방학 동안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기도 전에, 나는 해야 할 많은 것들을 목록화했다. 짧다면 짧은 방학에 가족과 하고 싶었던 것들, 가족을 위해 꼭 해야만 할 것들로 매일의 일정들이 채워졌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나는 내 시간을 꾸려야 했다. 생각해 보니 지난 육아휴직 기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육아' 휴직이니 아이들을 위하며 아이들을 챙기는 데 이 시간을 써야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하루 세 끼를 휴직 맘답게(?) 제공하고, 아이의 공부를 챙기고 집에 있는 동안 말동무가 되어주는 새로운 챗바퀴를 자청하여 열심히 돌았던 것이다. 과연 아이들이 엄마에게 원하는 서비스(?)였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있는 엄마'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자동적인 생각의 과정 하에 스스로 선택해한 일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방학에도 나는, '시간이 있는 엄마'라서 매일 집에 있는 아이들을 챙겨야 했다.
방학이 주는 여유에, 그래서, 과연 나의 몫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있기는 있다. 늦잠도 자고, 늦은 시간까지 넷플릭스도 보고, 할 일을 미루고 뒹굴기도 한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쉬고만 싶은 나는, 계속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나와 계속 싸우고 있다. 그렇다, 그것이 죄책감의 온상지였다.
미뤄둔 생각과 결심들로 버티며 죄책감을 회피해왔던 지난 한 학기가, 무의식적으로 쉬고 싶다는 나의 욕망과 만나자 죄책감 가득한 방학을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방학에 할 일, 해야 할 일들을 목록화하여 또 다른 이상적인 챗바퀴를 만든 의무감 넘치는 나는, 사실 그만큼이나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챗바퀴 위에서 힘겹게 달리며 지쳤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방학은 챗바퀴에서 잠시 내려와 쉴 수 있는 휴식이고,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볼 여유이고, 하루를 의무로 가득 채워야 했던 나의 역할을 얼마 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빈칸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은 못 하지만 방학 때는 할 수 있어'라는 시간으로 더 많이 바쁜 방학 을 머릿속에 설계해 둔 탓에, 방학을 맞이하자 또 다시 미뤄둔 계획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무의식은 열심히 현실 도피를 하며 꿈꿔왔던 휴식의 시간 속에 나를 밀어 넣고 있는 반면에, 나의 이성은 하나도 계획의 목록을 지우지 않은 채 끊임없이 어서 하라며 채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한가로워 보이나, 내면에서는 혼란의 도가니에 악몽을 꿀 만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방학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을 하는 중인가? 현실 도피를 위해 나는 최근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휴대폰에 매달려 글을 읽어제끼며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고 또 다른 죄책감을 생산해내려던 찰나, 나는 이것이 무의식이 준 며칠 간의 선물 같은 시간임을 먼저 알아차렸다. 넌 조금 더 쉬어야 해. 내일의 네가 계획을 실천할 거야. 읽다 보면 현실 따위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푹 빠져들게 만드는 로판 소설. 귓가에 이성은 끊임없이 개학이 며칠 남았다고 외쳐댄다. 치열한 싸움을 잊고자 나는 로판 소설로 또다시 도망간다.
결국 언젠가 이성에게 굴복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가 오고야 만다. 그러니까 남은 방학을 세지 말자. 지나친 걱정은 과유불급,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