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중 친해진 아이 친구 엄마와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용기 내어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촌스러워서 말할 때마다 왠지 부끄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의 이름은 7-80년대 시골의 딸 많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었기에 - 당연히 좋은 의미를 담은 이름이지만 -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는 다른 이유로 나 역시 통성명을 하는 자리에서 이름을 말하기를 잠시 망설이곤 한다. 나는 내 이름으로써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꽤 쑥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하다. 하지만 이름을 듣고서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되뇌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어찌할 줄 모르는 기분을 느껴야만 한다. '거꾸로 하면 주인공이네요!'라며 내 이름에 숨은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 이름을 자꾸 되뇌며 신기해하는 반응과 부모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냐며 이름을 참 멋지게 지었다고 감탄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쪽이든 그것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불편하여 자꾸 어디론가 도망가고만 싶어 진다.
이름이 특이한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나는 내 이름이 꽤 많이 부담스럽다. '주인공'이라니. 대체 무엇을 보아서 그렇단 말인가.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되뇌며, 마음속으로 느끼는 끝없는 괴리감과 낯섦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시험지나 공문서 맨 처음 빈칸에 이름 석 자를 기록할 때에도 그렇다. 내 이름이지만 절대 나의 것 같지 않은 이름. 자꾸 되뇔수록 내가 느끼는 이름의 무게는 무거워져만 가고, 그 앞에서 나는 자꾸만 주눅이 든다.
맞다.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아버지의 거창한 계획 하에 나는 특이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욕심 주머니가 몹시도 큰 분이시다.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도 야망도 컸고, 삶에 열정도 둘째 가라 하면 서러워하실 만큼 많으셨다. 그런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본인을 빼닮을 거라 기대하셨거나, 최소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주인공처럼 살라, 세상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살라. 이름의 의미를 인식한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해왔던 것 같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역시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가 이름값을 한다는 평가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었고, 모두 앞에서 칭찬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 이름 석자가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이 늘어만 갔다. 나약한 나는 부모가 살기를 바라는 그 삶의 틀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역할은 내게 확실히 버거웠다. 학급과 동아리 등에서는 늘 반장이나 장이 되려고 노력했고, 친구들 관계에서도 항상 중심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내가 원한다고 항상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어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누군가는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여 충격을 받기도 했고, 어느 집단에나 내재되어 있는 갈등 상황들은 매번 나의 역량을 시험에 들게 하여 극한에 내몰리는 듯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은근히 내향적인 성격의 나에게 매번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주인공' 역할은 대체로 부담스럽고 힘겨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인 척 탈을 쓰고서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공부 역시 그러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항상 박수를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우월한 이들을 질투하는 마음은 커져갔고, 노력의 부족함도 이유였겠지만 부족한 나의 공부머리를 자꾸 탓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조연으로 살면서 가슴 한편에 결핍 의식을 키워나갔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이름이 내게 지울 수 없이 새겨진 낙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좋은 의도로 지어주신 이름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왜 내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었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내 입으로 이렇게 좋은 이름을 가질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름값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못난 사람이라는 증거이기에, 나는 내가 내 이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내 이름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며 좇아온 '주인공'으로서의 삶은, 정말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맞는가? 진정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냥 대부분 주어진 삶을 살아왔을 뿐 나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었다. 마냥 최고가 되어 주목을 받는 삶이 주인공으로서의 삶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내가 잘못된 생각 속에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문학 작품에서도 보면 주인공은 단순히 주목을 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삶으로서 주제의식을 구현해내는 자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내가 처음으로 내 삶의 주인공이 되었던 때는 언제인가? 아마도 대학교 3학년 때, 2년 넘게 활동해왔던 대학교 신문사를 박차고 나왔던 때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자식이 신문기자가 되기를 바라셨던 아버지는 신문사의 국장의 커리어를 굳이 마다하며 신문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신문사에서 국장을 하게 되면 학교로부터 등록금 전액이 지원되며, 취재비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어려운 집안 사정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국장으로서의 경력과 이 모든 메리트들을 버릴 셈이냐고 다그치셨지만 나는 알아버렸다, 대학교 신문사에서 활동하면서 내가 언론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론인으로서의 마음가짐도, 현장을 누비며 열심히 취재하고 아이템 회의를 하고 싶은 열정도 없는 채, 마냥 신문사에서 주는 혜택을 챙기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로는 한시도 버틸 수 없는 곳이 신문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열심히 신문을 만드는 선배와 동기들 후배들에게 미안해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내 삶을 내맡기며 쫓기듯 생활하는 것을 택하는 것은 나를 기만하는 일이기도 했다. 힘든 집안 사정과 부모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신문사를 박차고 나와 자연스레 떠안게 된 빚을 갚기 위해서 이리저리 과외를 구하고자 뛰어다니는 상황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상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처음으로 진짜 나의 삶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작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주위의 기대에 못 미쳐 한없이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내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인공'답게 삶을 살려고 노력한 적이 거의 없었던 나약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매번 타인의 기대에 맞추느라 노력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고 나보다 돋보이는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끝없이 비교하며 살아왔는데, 사실 그것은 나를 많이 병들게 했었고 불행함을 느끼게 했다. 내 이름답게 사는 방법이라 착각해온 잘못된 삶이 지닌 그림자였다.
진짜 '주인공'으로서 살려거든, 내가 내 손으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스포트라이트가 없는 곳에서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타인이 정해준 삶을 그들이 짜 놓은 로드맵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 갈등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자신의 삶에 기꺼이 뛰어들며 그만의 결말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절대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삶이라는 문학 작품을 온전히 주체가 되어 이끌고 책임지는 자이기 때문이다.
마흔이 된 이제야, 나는 진짜 '주인공'답게 이름값을 하며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