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추어 봄.
나의 거울은 못생겼다. 깨진 파편이 되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 했던가. 분명 어른의 잘못된 행동이 아이를 망칠 수 있으니 아이 앞에서는 행동거지를 주의해라는 당부의 말이겠다. 나를 흉내 내는 아이의 모습에 놀라기 전까지는 내가 얼마나 부주의한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처럼 꼭 아이와 어른의 관계뿐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항상 이렇게 어딘가에 비추어진 자신이 아니라면 나에 대해, 내가 처한 사태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는 듯하다. 심지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것이 잘못된 태도라 지적하고 비판하고 싶진 않다. 그런 약점이 오히려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니까.
곱씹어 되뇐다라는 반추(反芻)라는 단어는 참 재미있는 말이다. 우선은 소나 염소 등 동물들이 속에서 먹이를 다시 올려 씹어 삼키는 행위, 즉 되새김질을 의미하는데, 어떤 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 활동에 이와 같은 반추동물의 습성을 이르는 말을 쓰고 있다. 결국 되돌아오거나 뒤집는다는 어떤 방향성에 주목한 표현일 것이다. 더욱이 반사한다는 영어 단어인 리플렉트(reflect) 또한 깊이 생각하거나 심사숙고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국가나 언어에 국한된 아이디어는 아닌가 보다. 인간을 생각의 반추동물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어떤 결정은 단번에 내려지지만 그것을 위한 과정에서 우리는 수십수백 번을 되새기고 비추어 보게 된다. 우리의 거울은 처음에 말했던 아이가 될 수도, 친구나 동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라는 유용한 거울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그 "유용하다"는 것은 편리함에 따른 것이지 정확도에 기반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거울은 파편화되어있기도, 왜곡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답을 알고 있어야 하는 질문은 "내 거울이 얼마나 정확한가?"가 아닌 "내가 내 거울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대학생 시절 지도교수님이 자주 인용하시던 성경 구절이 있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뭘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종교가 없지만 실로 마음을 울리는 말이었다. 예수는 신에게 자신을 처형하고 있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그들의 무모함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들 또한 그와 같은 잔혹한 행위를 함에 있어 수많은 고민을, 반추를 했겠지만 결국 자신의 거울이 정확하다는 판단 하에 처형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우린 정말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른다.
나의 거울은 못생겼다. 깨진 파편이 되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다. 여기저기 사라진 조각 때문에 실재를 완전히 비추지 못한다.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거울 조각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지만 답을 찾기는 항상 쉽지 않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참 많은 실수를 했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고 자만심에 빠져있다. 우리의 삶은 항상 반성이 필요하고 거울을 마주보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참, 그러고 보니 리플렉트(reflect)에는 반성한다는 뜻도 있었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