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lleehan Jul 07. 2018

가리워진 길

유재하 

여기 스물 세살 먹은 여자 애가 흰 천 위에 누워있다. 

미쳐 다 쏟아져나오지 못한 통증이 아랫도리에 묻어 나왔다.

밑이 벌겋게 헐고 부었을 때는 잠시 . 또다시 시간의 흐름에 온 몸을 두들겨 맞은 듯이.

두 다리가 힘없는 날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었다.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더이상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매미.

매미 우는 소리에 벌써 이 해의 중턱에 내 하루가 턱걸이 하듯 시간의 가장 끝에 매달리고 

있었구나 하고 내심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내일이 없는 것. 그녀 스스로 깨우친 그 허망함을 누구에게 건네주었을때. 있잖아 우리는 내일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사는걸 너무 노력 하지마 죽고 싶은 날에는 죽어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아내고 싶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 애가 열심히 살고 싶어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해주었다.

모든게 망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녀는 그걸 깨닫는 데에 이십 삼년이 걸렸다는 것도 덧붙여 말했다 .


여름 커튼이 빛을 내달고 하늘의 입김을 온 몸으로 받아낼 때 

바람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나 반복해 앞뒤로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흰 천이 일종의 언어를 하고 있나

앞으로 두번 뒤로 세번 또 앞으로 한번 저 멀리 한번 짧게 두번 모스 부호나 외계인의 신호처럼 

저걸 이진법 으로 계산하나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온 미래의 언어일까  

앞 뒤로 흔들리는 흰 천은 햇살을 덕지 덕지 바르고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나 

그녀는 담배 한 까치를 입에 물고 옥상에 터벅이며 올라갔다

높은 아파트들과 붉은 벽돌의 낮은 주택 건물들이 앞 뒤없이 일렬로 서있는 것이 

어릴적 넓은 하드보드지 위에 색종이를 오려 붙여낸 것처럼 누가 내 눈에 저 마른 하늘을 넓게 펼쳐놓고 건물 종이들을 붙여놓았나 

입체는 이 세상에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은 평면으로 납작한 세상이라는 듯이 눈알이 아파왔다 누가 쇠로 된 프레스기로 이 풍경을 납작하게 눌러 놓았나 


사는 건 너무 징그러워 . 징그럽지 않아?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저녁에는 저기에 해가 아직 있나 아니면 저기에 아직 달이 있나 싶게

이 곳 저 곳 아직 붉게 어스름 노을이 지는 오랜만에 그 애 처럼 투명하고 맑은 하늘이었다 

떠나보낸 사람들의 고운 얼굴과 또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그녀는

정말 내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애써 검지 손가락으로 툭 치면 

후르르 떠나가는 저 불길들처럼 내 것이었다가 다 재가 되어 태워보낸 사람들

그녀가 보았을 때는 분명 바닥에 비행기만한 그림자가 지나갔는데 머리 위에는 잠자리 한마리가 잠시 날았을 뿐이었다. 진짜 여름인가보네. 옥탑에는 바삭하게 마른 하얀 교복 블라우스가 춤을 췄다 .

초콜릿을 감싼 땅콩이 몇 알 박혀있는 아이스크림을 그녀는 가장 좋아했다.  왠일인지

아이스크림에서 탄 맛이 났다. 신기해. 얼린 것에서 나는 불에 탄 맛이라니 그녀의 혀는 낯설어서 울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달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