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 집 한편에 쌓아 올려진 짐들과 뉘어진 매트리스에 누워 별안간 그동안 서울에서 내가 거쳐온 집들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분홍 벽돌집
나는 아직도 그전에 살던 우리 집, 그러니까 내가 누워있는 이곳에서 스무 걸음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일주일 전만 해도 우리 집이었던 그 공간을 떠올린다. 우리 가족은 2017년 4월,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3학년일 때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운 좋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전셋값으로 세를 내주었던 주인이 재개발 일정에 맞추어 당신 집도 신축 고급 빌라로 짓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 덕에 천정부지로 솟고 있던 집값은 고스란히 우리 차지가 되었고, 엄마는 --- 정말이지 우리가 그 가격에 그런 집에 살았다니. 정말 궁전이나 다름없던 거야. 정말 이상한 집에 가야 할지도 몰라. ---라며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집에 도착했을 때 너무 마음에 든다며, 뻥 뚫린 뷰와 오래된 창틀도 운치 있어서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도 엄마는 이 낡은 집에 온 것이 미안했는지 문짝도 새로 칠하고, 장판도 새로 깔고, 도배도 새로 할 거라며 장대한 계획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리고 엄마는 그 모든 것을 정말로 했다. 문 경칩을 드라이버로 돌려 빼고, 페인트를 직접 사서 칠하고, 말리고, 몰딩엔 테이핑을 하고, 낡은 전등 스위치도, 얼룩진 장판도 모든 것을 다 고치기 시작했다. 나는 당돌하게 흰색이 아닌 베이지 컬러로 벽을 칠하겠다고 결정했고, 이틀 내내 팔이 빠지게 페인트칠을 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이 방에서 지내는 내내 후회스러웠다. 온 방이 누리끼리한 빛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렇게 이 집을 고쳐 써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만 해도, 이 집이 언니와 내가 시집을 가기 전 마지막같이 살 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니와 내 방에 들여놓을 가구도, 침대도, 모든 것이 엄마의 마지막 선물인 것 마냥 후했고, 또 섭섭할 정도로 시원했다.
창을 열면 주변 주택가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지대가 높았다. 층수도 맨 위층이었기 때문에 정말이지 한여름에는 태양을 정수리 위에 올려두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침에는 한쪽 볼이 햇볕에 타는 것 같이 따가워져서 깰 정도였다. 눈부신 채광과 뻥 뚫린 뷰를 즐기는 것은 처음 6개월 정도였고, 그 뒤로 나는 내 시력을 잃을 수 없어 블라인드와 암막 커튼을 두텁게 치고 지냈다. 이 집에서 떠날 날이 정해지자 나는 지금부터라도 하루에 한 번씩은 내방의 뷰를 감상하고 이곳을 떠나겠노라고 다짐했다. 날 좋은 낮에는 그래도 꾸역꾸역 조금씩이라도 창을 열어두고 살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처음 이사 오게 되었을 때 나는 이 뷰와 채광에 홀딱 반해 창을 한가득 열어두고 살다 보니 (그때도 3월 봄 즈음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그 공기가 방안에 가득 차 흘러넘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지체 없이 학교에 가지 않고 친구들을 초대해 옥상에 올라가 텐트를 펼쳐놓고 누워서 딸기를 씻어먹곤 했다. 어느 날은 참새가 집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블라인드와 암막 커튼이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을 시점부터는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이 집의 아름다운 점은 바로 옥상이었는데, 우리 집은 4층 꼭대기라 계단 한 층만 올라가면 바로 한국 특유의 전통적인 옥상을 즐길 수 있었다. 아랫집 할머니가 담근 된장이 장독에 들어차 있었고, 늘 납작한 소쿠리에 알 수 없는 건초들을 주렁주렁 말려두었다. 나는 정말이지 옥상 덕분에 빨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수리 위에 태양을 올려둔 그 옥상은 정말 멋진 빨래 건조를 보여줬다. 나는 주말에는 밀린 빨래를 옥상에 널으며 정말이지 삶의 만족감을 느꼈다. 가끔은 보기 좋게 비가 쏟아져 잔뜩 젖어 무거워진 빨래들을 도로 세탁기에 넣을 때도 있었지만 담배를 입에 물고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그 하늘과 뷰를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정말 이대로도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새끼손톱만 하게 보이는 3시 방향 주택의 옥탑에는 늘 책을 펼쳐 읽으며 걷는 대머리 아저씨가 있었고, 종종 빨래를 널기 위해 올라온 건너편 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꽤 먼 거리였으나 사방이 뚫린 옥상의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발견했다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머쓱하게 곧바로 담배를 비벼 끄고는 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나는 비좁은 거실에 들어찬 분수에 맞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아빠의 화분도, 블라인드를 뚫고 나오는 따가운 누런색 햇살도, 직접 칠하느라 그 색이 균일하지 않은 거실의 네이비색 벽도, 그 집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어쩌면 집에 관한 나의 애착은 이 집이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년 시절에 살아왔던 그 집은 나에게 공간에 대한 애착으로 따진다면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노란 대문 마당 집
내가 9살인가 10살이 되던 해, 우리는 오류동에서 사당동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오류 초등학교 학생에서 동작초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사당동에 살던 둘째 이모네 집에 놀러 가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와 이모가 남성초등학교도 괜찮은데, 동작초등학교가 좀 더 가깝고, 당신의 아들인 사촌 오빠와 학교를 같이 다니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남성이 아닌데 어떻게 남성초등학교를 가?라는 질문을 해서 엄마와 이모가 박장대소를 했던 그 모든 기억까지 합쳐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이주'를 하는 경험을 해봤던 것이다. 새로 전학 온 동작초등학교는 계단이 너무 많았고, (후문에 있는 계단은 무려 200개 남짓이어서 학생들은 그곳을 200계단이라고 불렀다.) 왜인지 모르게 사람들은 쌀쌀맞았다고 느껴졌고, 이모네와 우리 가족들 빼고는 모두가 처음 보는 사람들뿐인 데다 집 앞을 나서면 아는 길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열 살배기 나에게는 커다란 재난 그 자체였다.
사촌 오빠는 오류 초등학교보다는 운동장이 훨씬 넓을 거라고 의기양양해했지만, 오류 초등학교가 운동장이 3배는 더 넓었다. (초등학생은 이런 걸로 학벌을 나눈다.) 나는 대꾸하기 귀찮아서 의기양양해하는 오빠를 받아주었다. 왜냐하면 사촌 오빠는 나름 그곳에서 태어난 로컬이었고, 나는 새로 온 뉴비로서 적응해야 하는 포지션에 있었기 때문에 오빠의 기를 꺾는 건 나에게는 그다지 편안한 타지 생활 적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당동에 처음 머물게 된 이 집에서 내가 10살 때부터 22살 때까지 거의 13년을 살아온 것이다. 학생인 신분으로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집에서 보냈다.
동작초등학교에서는 뛰어서 3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집이었다. 누런색 커다란 대문이 있었고, 가운데는 코를 뚫은 사자가 문고리 역할을 하는, 아주 티피컬한 한국의 2층짜리 주택이었다. 주인집은 1층에, 우리는 2층에 세를 들었다. 주인집은 대문으로 다녀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런 것에 염치를 크게 느끼는 사람이라 절대로 우리는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옆에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쪽문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곳 바로 앞이었다. 여름에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심지어 밤에는 꼽등이들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날에 그곳을 지나갈 때는 내 발에 꼽등이가 끼어들어가면 어떡하지?라는 공포 속에 그 계단 앞을 거의 다리를 찢는 수준으로 보폭을 넓혀서 순식간에 올라가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냄새나고 좁은 쪽문만 넘어가면, 작지만 아름다운 마당이 있는 것이 참 좋았다.
주인집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늘 새로운 모종을 사 와서 심었고,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면 우리 집에 가져다주곤 했다. 언제는 10살 때쯤, 친구와 마당에 데리고 와 놀았다.(원래는 우리 엄마가 알아서는 안 되는 큰일이었다.) 작은 수도가 연결된 곳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토끼풀이 많았다. 우리는 그 토끼풀 사이에 숨겨진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보겠다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창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윗집에 사는 첫째 아들이 창을 통해 우리를 내려다보며 너 여기 사니?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게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나는 열 살 평생 아파트에 살아왔던 아파트 키즈였기 때문에 이웃 주민이 나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렇게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 네.. 위층에.. '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도망치듯 그곳을 나와야 했다. 마치 그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공간을 훔치다 걸린 것만 같은 수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고등학생이었던 주인집 아들은 그저 모르는 어린이 두 명이 집 마당에서 풀을 뜯고 놀고 있으니 당연히 여기 사는 그 어린이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쯤에 키우게 된 물고기가 죽었을 때 나는 이 집 마당 한편을 모종삽으로 파내고 그곳에 검은색 붕어를 묻어준 일이 있었다. 어린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다음날 그곳을 다시 파보았으나 정말 이상하게도 감쪽같이 금붕어의 사체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이 너무나 충격을 받고 공포에 떨었다. 대체 붕어의 사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정말 그 새 다 썩어 없어진 것일까? 개미나 쥐 따위가 그걸 그새 다 파먹은 것일까? 누군가가 그 붕어를 묻는 나를 보고 골려주기 위해 다시 파내버린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집이 모두 허물리고 고급 연립 빌라로 다시 지어진 후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지하에는 아직도 헤엄치고 있을 내 동심을 떠올렸다.
그 집은 옥상은 없었지만 대신 베란다 역할을 하는 테라스가 있었다. 우리는 이사 오고 나서 초반에는 이모네 가족을 초대해 그곳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곤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사촌 오빠와 동생, 아빠 나 언니 이렇게 모여 큰 통 아이스크림을 하나 까서 둘러앉아 퍼먹으며 불멸의 이순신을 같이 봤다. 사촌 오빠와 아빠는 이순신의 단골 대사였던 '발포하라!'를 큰소리로 외쳐대길 바빴고, 언니와 나는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깔깔대며 웃었다.
또 현관문은 도어록이 아니어서 우리는 열쇠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열쇠를 꼼꼼히 챙겨 다닐 리가 없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면 늘 잠긴 문을 두고 옆 베란다로 위험천만하게 넘어 다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응당 초등학생이라면 그렇게 사는 게 법칙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현관에 달린 우유주머니에 열쇠를 넣어두고 다녔지만, 그것 또한 얼마 가지 않아 잃어버렸다. 그래도 초등학생은 아무렴 괜찮았다. 베란다를 넘어 집에 들어가면 되었다. 혹여나 베란다도 문이 잠겨있어 그날 집에 바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면 친구랑 마당에서 네 잎 클로버 찾기 놀이를 하거나, 놀이터에 가서 오징어 게임을 하거나, 정글 짐에서 도둑과 경찰 놀이를 하거나, 흙모래 먼지를 잔뜩 묻히고, 그러다가 친구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영업을 당한다거나 하는. 이 모든 게 초등학생의 일과였다. 친구와 당시 유행하던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것도 그 루틴 중 하나였다. 우리는 버즈, 전혜빈, 주얼리, 아이비 등 그 당시 대중가요계를 뒤흔들어놓았던 그 모든 아티스트들의 노래를 집안 가득 크게 틀어놓고, 엄마의 옷장을 뒤져 서로를 새빠지게 꾸며주었다. 나와 내 단짝 친구는 친구의 언니가 가지고 있던 카고 바지를 해체해 미니스커트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우스꽝스럽게 실밥도 튀어나와 있고, 기장도 어수선한 말 그대로 무늬만 치마였지만 우리는 그걸 멋지게 '리폼'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했다. 이 집에서 중학생이 된 나는 늘 내 방 한편에 라디오를 틀어놓았고, 아빠가 물려준 검은색 커다란 책상에 앉아 사춘기의 밤을 지새우곤 했다. 숨죽여 89.1 mhz 주파수를 맞춰놓고 나서는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다 자정을 알리는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시그널 음악이 들리면 잠자리에 눕곤 했다. 나는 어렴풋이 이때쯤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계획한 것도 같다. 그것은 내 신성한 사춘기의 밤을 지키기 위한 원대한 이상 같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이제 공부할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집에서는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고 엄마 아빠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방과 후에 학원을 가기 전 집에서 보내는 2시간 남짓의 시간은 나에게 유일한 자유의 시간이었다. 안방에 대자로 누워 선풍기를 틀어놓고 엄마가 소분해 얼려둔 카레를 데워먹었다. 티브이에서는 스펀지나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나왔고, 나는 카레를 다 먹으면 오백 원짜리 하나를 들고 근처 구멍가게에 가서 입가심할 하드 하나를 사 오곤 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보낸 나는 시간이 흘러 흘러 고등학교에도 입학하고, 수능도 보았고, 대학생이 되었다. 검은 책상 위에 라디오와 엠피스리 대신 아이폰이 올라갔고, 색연필과 스케치 노트와 교과서 대신 화장품 더미가 올라갔다. 옷장 서랍도 늘어나는 옷더미에 감당이 안 됐는지 입을 헤벌쭉 열고 옷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 시점 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예쁜 방에 대한 니즈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20대 초반의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빠의 넓고 튼튼한 검은색 책상 대신 화장대와 거울이 필요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류동 금강아파트
사당동에 오기 전 더 어린 시절, 그러니까 9살 때까지 오류동에서 살던 아파트는 자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정말 높은 언덕을 굽이굽이 올라야만 아파트 단지 내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름이 금강 아파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곳 단지는 경사가 많아서 한창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 등을 배울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집 앞에서 타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아파트 단지로 올라오던 꼬불꼬불한 주택가 골목에서 한 대문 사이로 늘 마중 나와있던 그 강아지가 기억난다. 언니와 나는 하굣길에 그 강아지 앞에서 한창을 쪼그려 앉아 대문 사이로 물을 건네주거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주곤 했다. 그 강아지가 성견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작은 새끼 강아지에서 어린이 강아지가 되었을 때쯤에 우리는 오류동을 떠났다.
이 모든 곳이 다 우리 집이었다는 사실에 세월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참 아직도 어린것 같은데, 누구나 그렇듯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주일 전 떠나온 그 집도 곧 허물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허물리기 전에 그 집 옥상에 한번 다시 올라가 볼까 했다가도 기분이 더 이상해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항상 이사는 나에게 늘 급한 작별 같다. 한동안 그 분홍색 벽돌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