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한용운의 시집이 사천원에 팔린다 .
손바닥 만하게 팔린다 .
종이 냄새 만연한 대형 서점에서 먼지 한톨 쌓일 틈 없이 톡 톡 하고 여러 권 엉겨 있다 .
대한민국의 누구라면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외운 적이 있을 것이다 .
그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승려이자 시인이고 1879년 8월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했다 .
라고 사천원짜리 시집 맨 첫 장에 적혀 있다.
솔직하게 발가 벗은 낱말들이 그가 승려였음을 의심하게 한다.
나는 장을 넘길 때마다 자음과 모음에 살갗이 내걸린듯이 매달려 읽었다.
한용운의 시집이 사천원에 팔린다 .
나는 그것이 반가웠다 . 이 정도 가격이라면 글을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시집을 한손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그것이 참으로 반가웠다 반가워서 나도 .
얼음컵에 냉커피 담아내는 가격과 얼추 비슷하게 우리는
이 시집을 한 손에 잡을 수 있다 .
그리곤 나는 시집을 돌돌 말아 꽉쥐고 서점 바닥을 걷어차며 몇 바퀴 돌았다 .
나는 문명을 단돈 사천원에 샀다. 는 생각에 비로소 너를 쾅 하고 밟아 일어섰다 .
사천원 짜리 시집은 문명이다 이 것보다 무엇이
더 문명다운 문명인지 너는 알고 있니 ?
어머. 그러고보니 너가 듣는 음악은 나도 듣는 음악 . 너가 보는 영화는 나도 보는 영화 .
너가 읽는 책은 나도 읽는 책 . 그렇게 따지면 너가 날아갈 수 있는 만큼
나도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가벼울 수 있는 영혼임을 .
하긴 너가 누리는 영광이랄게 별게 아니야 . 그렇지?
하고 너를 밟아낸 땅에서 발을 드러내니 납작 하게 죽어있었다 .
그 사이 서점 직원은 지긋하게 계산대에 놓인 책들에 스탬프를 차례로 찍어내고 있었다.
사천원 짜리 내 값싼 문명을 이십원짜리 종이가방안에 담아넣고는 끌어안았다.
사천원. 사천원이면 내리 한달 밤 이 글을 끌어안고 울 수 가 있다.
사천원이면 나는 사랑을 안다 . 사천원이면
하룻밤에 나는 꿈꾸는 지식인이 된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함부로 공짜인 세상이라
너는 너가 부호임을 모르고 나는 내가 가난뱅이 인 것을 모른다 .
너는 너가 가진 줄을 모르고 나도 내가 굶는 줄을 모른다 .
그래서 교만은 더 교만해지고 빈곤은 되려
빈곤해진다 . 그리하야 너는 교만을 등에 지고 나는 빈곤을 잃는
엎치락 뒤치락 빈자먼저 갑부먼저 하면서 괴기스러운 모양새가 된다 .
책장을 몇장 넘겨내고 나서야 그럼에도 너를 부러워 했던 것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동부이촌동 어느 지하 일식당에서 삼만 칠천원 짜리 명란 계란말이 한 줄에 나는
아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우둔한 바보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15년 전 엄마는
주말마다 이 곳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에 여덟살배기 작은 딸을 데려왔었다 .
다시금 몸만 커서 이 곳을 찾아와 여전히 낮은 목뼈를 돌려 주변을 돌아 보니
이 많은 책장들이 모두 내 처방전. 내 처방전. 이게 다 나의 처방전인 것이다 .
나를 구원할 종이와 잉크들 . 찍힌 문자들 .
감히 너희를 누가 땔감이라 하겠는가 하고 그래 빙하기. 빙하기가 오면
너희들을 태울게 .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마음이 너무 아파서 차라리 찢어먹어버리고 말지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종잇장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온 몸 사이 사이 구석에 2톤 쯤은 끼워넣고 잠들고 싶었다.
나를 구원할 책장들이 이렇게나 펄럭이며 쌓여있었다.
겹겹이 얇게 고이 누워 나를 기다리는 구원자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
그걸 그렇게 괴로워 하던 것이 나였을리가. 하고
한용운의 시집을 사천원에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