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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Nov 01. 2024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26개월의 천국


아이와 종일 하루를 보내며 지나던 어느 날 밤,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말했다.


“여보, 육아는 이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계속 맡게 되는 기분이야. 근데 이 일은 사수도 없고, 나를 대신할 사람도 없어. 근데 또 내가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이 길을 먼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좋을 때라고, 그 시절이 그리워. 그때가 천국이야. (계속 끝나지 않는 천국?)”

“육체 육아가 끝나면 정신 육아가 찾아오는데, 이건 또 다른 어려움이야.(무섭다!)”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것만 기억돼서 그러는 걸까. 분명히 아쉬워질 오늘임이 분명한데, (둘째 계획은 없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보내는 시절들인데... 그 마음을 곱씹을 새도 없이 다른 마음이 찾아올 때도 있다. 간혹 생각한다. 육아가 이런 돌봄이 적성에 딱 맞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은 정말 순하고 천사 같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다.’ 정확한 시점은 잘 모르겠지만 두 돌을 기점으로 점점 자신만의 세계가 생기고 있다. 26개월을 열흘 앞둔 지금, 아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 아니야.(이거가 무엇인지 가끔 본인도 잘 모르는 듯)”.

“유아차 안타. 00이 걸어갈 거야.”

“혼자 갈 거야. 손 안 잡아.”

“아니야. 아니야. 엉엉엉 엄마 가. (엄마 어디가, 한국으로 갈까? 땡큐)”  

“00가 할 거야. 00가. 00가..”

엄마 가! (어디로?)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 어쩌면 아이의 자라는 속도만큼 엄마인 내가 자라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처럼 ‘너무 귀엽지만 가끔 도망가고 싶어’라는 마음이, 엄마가 되며 복합적인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며 어두운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 더더욱 어두운 죄책감까지 내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다. 간혹 이러한 마음과 싸우는 날들이 있다.


오늘은 손에 꼽는 ‘매운맛’의 하루였다. 음악만 나오면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는 아이를 위하여, 집 근처에 있는 ‘리듬체조 수업(춤)’에 갔다. 정확히는 두 번째 수업이다. 편한 옷을 지참하고 아이까지 총 5명의 정원이라는 수업에 갔더니 우리 아이를 제외한 4명의 아이들이 풀로 장착한 리듬체조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우리 아이보다 컸다. 첫 수업에서 아이는 그래도 잘 따라 하는 편이었다. (중간에 한번 이탈했지만)

흐뭇했던 첫 번째 수업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 수업. 인터넷으로 주문한 무용복이 아직 배송 중이라 오늘은 스타킹도 신고 이질감이 없도록 옷을 입혀서 갔다. 저녁 6시 수업에 담당 선생님의 지각, 와이파이 및 블루투스 스피커 문제 해결을 하느라 정상적인 수업은 30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이미 아이는 스튜디오를 방방 뛰어다니며 에너지는 모두 고갈된 상태였다. 그러니, 수업이 시작되자 잠깐 집중하더니 금세 바닥에 드러눕고 혼자 곳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말했다.


“엄마가 옆에서 같이 하세요.”

“(지금의 우리 아이는 엄마가 옆에서 같이 한다고 순순히 따라 할 아이가 아닌데...)”


처음엔 아름답게 시작한 수업
10분 후... 점점 바닥과 한 몸이 되는 아이

역시나 아이 옆에 섰지만 아이는 도망 다녔다. 선생님의 몸동작을 잘 따라 하는 다른 아이들(언니들)에게 방해가 되고 있었다.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의 엄마도 눈치를 준다. 이제는 동그란 발매트를 입에 물었다. 물면 안 된다고 말하고 바로 빼주었는데르, 아예 입안으로 쏙- 선생님도 뺏었지만 소용이 없다. 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부터 아이의 울음이 시작됐다.


“할 거야. 다시 할 거야. 엉엉 엉엉”


탈의실에서 울며 바닥에 뒹굴거리는 아이를 안아 간신히 옷을 입히고 품에 안고 데리고 나왔다. 눈물 콧물 땀범벅이 된 아이를 안고 나도 땀벅벅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말이 잘 통하는 한국에서 하는 수업이었다면 괜찮았을까. 좀 더 이런 아이까지 품어줄 수 있는 선생님과 수업 분위기, 그런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이방인으로 사는 나의 마음까지 더해져서 그랬는지, 왠지 아이에게 미안하고 ‘아이의 경험’ 보다 다른 이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더 불편한, 눈치를 보는 성향의 엄마라서 미안했다. 좀 더 두꺼운 낯으로 뻔뻔하게 버틸 수도 있는 건데, 아이가 뒹굴더라도 그냥 우리 아이는 신경 쓰지 말고 수업하셔도 괜찮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내 마음이 불편해서 중간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게 맞았을까. 역시 이번 일도 나는 답을 모르겠다.

요즘 네 안엔 어떤 일이? 네가 사는 천국은 어떤 곳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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