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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Aug 09. 2020

아무튼 원데이 클래스

배움으로 나다움을 찾아가는 시간 

나를 잃어버린 시간스물여섯의 봄 

첫 직장은 여의도에 있었다. 출근은 아침 9시였지만 퇴근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계속 뒤엎어지면서 팀은 비상에 걸렸다. 신입이면서, 막내였던 나는 일주일 치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밤샘 근무와 토막잠이 사흘이 되던 날, 급한 일을 처리하고 회사 숙직실 침대에 누웠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다.     


© agathemarty, 출처 Unsplash

- 언니, 여긴 지금 벚꽃이 한창이야. 한국 날씨는 어때?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 찬 작은 방, 동생이 보낸 벚꽃 사진만 환하게 빛났다. 살짝 커튼을 들춰 밖의 풍경을 보았다. 낯설었다. 따스한 햇살에 하얀 봉오리가 맺힌 나무들이 보였다. 맞은편 담장엔 노란 개나리가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 한 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둠 속에서 답장을 썼다.      


- 응, 여기도 이미 봄이 와 있었네... 


스스로 선택한 첫 번째 배움일본어 

프로젝트가 끝나고 갑작스레 주어진 휴가, 고민할 새도 없이 동생이 있는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동생이 출근하면 느지막이 일어나 동생의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동네를 구경했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 보낸 일주일의 시간, 그림처럼만 보이던 글자들을 읽고 싶어 졌다.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바로 학원에 등록했다.      


아침 7시, 종로의 일본어 학원에는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이 많았다. 대부분 회사에서 일본어를 쓰거나, 승진이나 파견을 목표로 일본어를 배운다고 했다. 그들과는 달리 큰 목표가 없던 나는 크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처음 접하는 히라가나 글자는 신기했고, 그림처럼만 보이던 단어를 천천히 읽게 되었을 때는 처음으로 말문이 트인 아이를 보듯 스스로가 대견했다.      


© craftedbygc, 출처 Unsplash



매일 아침 한 시간, 작은 강의실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만났다. 일이 해결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어제의 나도, 선배에게 혼나 화장실 변기에 앉아 숨죽여 울던 그저께의 나도 그곳엔 없었다. 이미 바짝 말라버린 걸레를 비틀어 짜는 듯한 하루하루가, 출근 전 한 시간 일본어를 배우는 그 시간 덕분에 나를 촉촉하게 채우며 시작되었다. 아침잠을 포기했지만,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됐다. 그때야 알게 됐다. 나는 무엇인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야 진짜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나다움을 회복하는 시간원데이 클래스 

“해야만 해서가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것”만큼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스스로 선택하여 배우게 된 일본어를 통해, 몰입과 배움의 기쁨을 맛본 나는 그 뒤로 다양한 배움의 기회에 나를 노출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나만의 원데이 클래스 여행이 시작됐다. 주로 손으로 무엇인가 만드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다녀온 수업의 종류는 다양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광화문에서 케이크 만들기, 연남동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마카롱 모양의 비누를 만들었고, 망원동의 꽃집에서는 현관을 장식할 수 있는 리스를, 이태원의 작은 가게에서는 향기가 좋은 소이캔들 제작, 프랑스 자수 스티치를 배웠다. 


© apothecary87, 출처 Unsplash


원데이 클래스의 매력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직접 배우는 것도 있지만, 수업이 끝나면 작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앞두고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할 때, 답이 나오지 않아 막막한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 나는 원데이 클래스를 찾았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에 휩싸인 나를 돌보는 것은, 무사히 하루의 수업을 마치고 두 손에 결과를 쥔 또 다른 나였다. ‘괜찮아, 일단 한번 부딪혀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늘 원데이 클래스는 나답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오늘도 '배우는 사람'으로,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 

가끔은 “그거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또는 “앞으로의 목표가 뭐야?”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럼 그냥 웃고 만다.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처음으로 배웠던 일본어 덕분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게 되었고, 프랑스 자수 스티치로 브로치를 만들어 친구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지금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는 나는 또 다른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찾아온 사람과의 만남, 내게 주어진 상황, 내 눈에 띈 한 권의 책, 이 모든 것이 나에겐 오늘의 원데이 클래스가 된다. 그 안에서 천천히 나를 살핀다. 내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나다운 것을 찾고 싶어서 오늘도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 timmossholde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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