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가사리 Oct 16. 2020

나의 엠씨스퀘어 (feat. 집중이 필요할 때)

글을 쓸 때 듣는 음악들

내 컴퓨터에는 <엠씨스퀘어>라는 폴더가 있다.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이 폴더에는 집중이 필요할 때 듣는 음악들이 저장되어 있다. 일단 가사가 없으며, 귀에 거슬리지 않을 것. 졸음을 유발하지 않는 선의 잔잔한 곡들이다.

<엠씨스퀘어>는 고등학교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기계였다. 엄마가 가져온 상자엔 검은색 선글라스와 리모컨 본체, 이어폰이 같이 들어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된 듯, 3D 영화관에서 나눠주는 생김새의 안경을 쓰면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이어폰에서는 일정한 간격의 소리가 들렸다. 학습 전과 후에 착용하면 학습의 능률을 높여 준다는 장치. 수면 시 모드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건 몰라도, 수면에 큰 도움을 받았다. 캄캄하고 조용한 독서실에서 안경을 끼고, 일정한 파장의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잤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학교를 졸업하면 더 이상 <엠씨스퀘어>가 필요한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면서도 꾸준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들은 넘쳐났다. 작업하는 종류에 따라 우리가 선택하는 <노동요>는 달라졌다. 회사의 이벤트를 앞두고 단순한 작업을 반복해야 할 때는 가사가 있고, 비트가 있는 신나는 음악을 들었다. 예를 들어, 페퍼톤스 ‘행운을 빌어요’ 같이 함께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선택했다. 아프리카 출장을 가서 보고 느낀 것들을 두고 오는 길, 현장에서 수도로 오는 긴 여정에는 좋아서 하는 밴드 ‘릴리’를 들었다. (최근 조준호의 어쿠스틱 버전 ‘릴리 Lilly’는 단연 최고다)


https://youtu.be/CBbokHjMCPs

조준호 <릴리>


영화 안경(2007) 은 이미 전작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여성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의 작품이다. 오키나와 근처의 요론 섬,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곳에서 일상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좋아하던 배우 카세료 때문에 선택했지만,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특유의 감성, 특히 영화 내내 깔리던 음악이 너무 좋아 그 영화에 한동안 푹 빠졌다. OST 앨범이 함께 있던 책을 함께 샀다. 이후 요론 섬으로 영화에 나온 숙소를 예약하여 휴가를 다녀왔다. 그 앨범을 들으며 글을 쓰면, 하얗게 텅 비어 있는 화면은 파도의 물결처럼 깜박이는 커서는 내가 타기를 기다리고 있는 배처럼 느껴져서, 바로 배에 올랐고 글은 금세 차올랐다. (퇴고의 길은 멀지만...)


https://youtu.be/RSzRJUirvM8

영화 안경 めがね (2007)


최근에 이 곳에 한 종류의 음악이 추가되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를 읽은 후다. 그녀는 글을 쓸 때 듣는 음악으로 빌 에반스와 짐 홀의 <인터 모듈레이션 intermodulation>을 추천했다. 재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추천 앨범이라 과감하게 나의 <엠씨스퀘어> 폴더에 추가했다. 그리고 최근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이 됐다. 짐 홀의 기타와 빌 에반스의 피아노, 두 악기로 진행되는 서로 주고받는 차분한 대화처럼 느껴지는 곡들이다.  


https://youtu.be/L9Gc2QnbQTY


팟 캐스트에서 초대 손님과 일대일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그것을 ‘이중주’라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짐 홀의 역할을 맡는다.
_ 김하나 <말하기를 말하기>
이 앨범에서 짐 홀은 어쩐지 빌 에반스를 위로하는 것 같다. 내성적이고 의기소침한 빌 에반스에게 “오늘은 내가 한잔 살게,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고 말을 건넨다. 칩거 중이던 빌 에반스는 나갈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외출 준비를 하고 마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며 그럭저럭 기분 좋은 저녁을 보낸다. 어쩔 수 없이 벌어진 나쁜 일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배려를 하는 것도 재주다. 짐 홀의 연주는 그렇게. 빈 잔을 내려놓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조용한 바텐더처럼,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존재하는 느낌이다. 거기에 빌 에반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수를 아주 우아한 동작으로 조금씩 따라 붓는다.
_ 이재민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이 글을 쓰면서도 이 앨범을 반복하여 들었다. 작은 책상에 켜진 스탠드가 모니터와 키보드를 비춘다. 주변은 금세 어두워진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흐르는 피아노와 기타의 선율에 맞춰,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중주에서 삼중주로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연주자가 된다.


나의 작은 작업실. 벽에는 러시아어 격변화표가 ... ;;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에선 매 끼니가 소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