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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Jan 31. 2021

스티커와 새해 약속

오늘도 붙이고 싶어서


결혼 전 처음이자 마지막 독립은 서울 화곡동이었다. 회사가 있는 여의도와 출퇴근이 가까우며, 사람이 너무 많은 9호선 라인을 피하고, 많이 번화하지 않은 주택가를 찾다 보니 그 동네의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신축 빌라로 1층이었지만, 작은 테라스가 있는 부엌과 방이 분리된 구조의 원룸을 구했다.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건, 내 취향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중 내가 집착한 공간은 부엌이었다. 원하는 음식을 요리할 수 있다는 기쁨. 그릇뿐 아니라 고무장갑, 주방세제와 솔, 나만 아는 소소한 것으로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새벽 배송이 활발하지 않을 때라, 직접 가까운 슈퍼에서 장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슈퍼마켓이 없는 동네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곳은 역 앞의 A마트였다. 퇴근하는 길 ‘손에 들 수 있게 몇 가지만 사야지’ 하고 마트로 들어가지만, 어느새 장바구니를 챙겨 차곡차곡 담으면 3만 원이 훌쩍 넘었다. ‘얼마 사지도 않았는데.....’ 계산을 하고 나니 계산원이 영수증과 함께 포도알 스티커를 건넸다.

“이거 뭐예요?”
“스티커예요. 모으는 종이 없으세요?”
“네. 오늘 처음 와서... 최근에 이사 왔어요.”
“다 채우면 상품이랑 바꿔줘요. 쓰여 있으니까 읽어보세요.”

그녀는 알이 비어있는 포도 한 송이가 그려진 종이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슈퍼마켓 스티커였다. 본가의 집 근처엔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뿐이었고, 포인트는 휴대폰 번호를 눌러서 카드에 쌓였다. 영수증을 살피면 얼마나 쌓였는지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유심히 본 적은 없었다. 비어있는 포도송이 종이를 냉장고에 붙였다. 그리고 6개의 보라색 포도알을 어디부터 채울까 고민하다가 꼭지 아래에 붙였다. 그 후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매일 퇴근길 슈퍼에 들렀다. 한 달도 안되어 꽉 찬 포도 한 송이를 두루마리 휴지와 교환했다.


© lemonvlad, 출처 Unsplash


잊고 있던 슈퍼 스티커를 다시 본 건 몇 년이 지난 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슈퍼에 우연히 들렀다가, 계산대에서 작은 팸플릿을 발견했다. 그 달의 할인 품목이 소개된 건가 살폈더니, 마지막 장에 숫자가 쓰였고 스티커를 붙이게 되어있다. 꾸준히 채워 포도 한 송이씩 수확하곤 했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이건 해야 해!. 근데 러시아어로 어떻게 말하지?’ 고민하다가 계산원에게 팸플릿을 손으로 가리키며 내가 할 수 있는 러시아어로 물었다.

“이게 뭐죠?” (이게 뭔지 알고 있어요. 계산했는데 난 왜 스티커 안 줘요?)

러시아인 계산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돌돌 말려있던 스티커 모음을 꺼내, 북 찢은 후 내게 건넸다. 300 루블 당  동그란 스티커 1개였지만, 귀찮았던지 1000 루블을 산 내게 스티커 10개를 줬다. 스티커를 발견한 후 꼭 그 슈퍼에서 장을 봤다. 러시아어도 미리 연습했다.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은 물건을 가방에 담으며, 스티커 때문에 금액을 맞춰 산 게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스티커 주시겠어요?” 대부분 산 가격에 비해 많은 스티커를 줬다. 이 곳에서 스티커는 할인 쿠폰이었다. 동그란 스티커를 10개 모아서, 원래 918 루블의 거위털 베개를 459 루블에 샀다. 남편과 나, 두 사람의 베개를 안고 오는 길 왠지 알뜰한 살림꾼이 된 것 같았다. (이케아에서는 더 싸게 살 수 있었겠지만)  알고 있다. 스티커는 마케팅이라는 걸, 손님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속셈이 분명했지만 매번 붙이는 즐거움과 나의 꾸준함이 들어간 합리적 소비였어 라며 모르는 척 넘겼다.


러시아 슈퍼마켓의 스티커, 열심히 모으는 나는 알뜰한 살림꾼!?


2021년이 되면서 책상 위 탁상달력에 작은 원형 스티커가 등장했다. 이전의 나는 붙이는 자였다면, 이번 스티커는 공급도 수급도 둘 다 나 자신이다. 새해 목표를 적으면서 스스로 지키기 힘든 목표에 스티커의 색을 정했다. 그중 하나는 홈트였다. 집콕만 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체력이 급속도로 저하됐다. 며칠 밤을 꼬박 새도 너끈히 일하던 때가 있었다. 선배들은 말했다. “너 잠은 잤니? 어디 가서 눈 좀 붙이고 와. 그러다가 한 방에 간다.” 그 말이 뭔지 너무 잘 아는 몸이 됐다. 밤샘 불가, 잠을 많이 자도 피로가 쌓였다. 하고 싶은 것을 오래 하려면 ‘건강’ 이 중요하다. 특히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는 게 포인트다.  

주 4회 이상, 1시간의 홈트를 나 자신과 약속했다. 운동은 늘 시작이 어렵다. 아침이 소화가 되면 옷을 갈아입고, 매트를 깐다. 아이패드로 영상을 켰다. 어느 날은 세탁기를 함께 돌린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에 함께 몸을 움직인다. 약속을 지킨 날엔 달력의 그 날짜에 초록색 작은 동그란 스티커가 붙었다. 지난 3주간 총 12개의 초록색 동그라미가 달력을 채웠다. 2월에는 더 많은 초록이들을 볼 수 있기를, 스스로 주고 붙이는 약속 스티커. 꽉 채운다고 휴지도, 베개도, 냄비도 얻을 수 없겠지만 보이지 않는 튼튼한 근력이 몸과 마음에 스티커처럼 찰싹 붙으면 좋겠다.


1월 한 달간 열 두번의 스스로 홈트 ;) 초록 스티커 붙이고 싶어서 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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