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눈물샘은 마르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처음 보는 사람들, 온라인 화면 앞에 앉아 울다니... 아무도 못 봤겠지? 그때였다.
“불가사리님, 목소리 듣고 싶어요.” 같은 신입생인 그녀가 말했다. 평범한 강의실이었었다면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은 다르다. 모든 이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떡하지. 다시 눈물샘이 차올랐다.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로 오면서 경력이 단절됐다. 해외에서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지난여름 한국어학당 교사로 일하는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너 예전에 한국어 양성코스 하지 않았어?”
“회사 다닐 때 수료했지. 근데 시험은 안 봤어. 교사하려면 2급 있어야 하잖아.”
“대학원 졸업하면 되는데, 사이버대학원이 있어.”
가슴이 뛰었다. 학교에 문의해 연락처를 남겼고, 겨울이 되자 2021년 신입생 모집 안내 메일을 받았다. 십 년 만에 자기소개서를 쓰고, 경력을 살린 학업연구계획서도 작성했다.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차 최종면접을 봤다. 발표의 날, 수험번호를 치니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캄캄했던 나의 거리에 불이 켜졌다. 새로운 길이 보였다. 이제 앞으로 걸어가면 되는 거야. 하지만 신입생 중심 단톡방이 생기고, 대학원 원우회 카페에 가입하며 길은 점점 어두워졌다. 출장 중인 남편과 영상통화를 했다.
“괜찮아? 표정이 어두운데... 너무 무리하지 마.”
“나만 빼고 모두 경력이 화려해. 브라질, 싱가포르, 독일... 현직 한국어 교사들이야. 나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열정이 넘치는 세계 한국어 교사들이 모인 단톡방은 밤낮없이 울렸다. 희망자만 들을 수 있는 방학 특별 수업에 너도, 나도 참여하겠다는 이모티콘으로 꽉 찼다. ‘저도 함께할게요.’ 조용히 의사를 밝혔다. 그들과 나는 출발선이 다르다.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해. 매일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국어 조사와 방언 연구에 관심이 있는데요.”
“선배님, 에/가/은/는 에 대한...”
한국어 교육현장에 대한 질문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매일 조금씩 작아졌다. 마음이 흔들거렸다. 네 번째 수업이 열리는 날 아침, 꿈에 면접에서 만난 교수님이 나왔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는 힘들겠어. 왜 겉만 돌고 있나? 자네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깜짝 놀라 소스라쳐 깼다. 예지몽일까. 내 깜냥을 모른 채 입학한 건 아닐까. ‘사람은 자신의 능력 120%엔 도전 의욕이 샘솟지만, 그 이상이면 포기한대.’라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꿈속의 교수님의 했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나만이 쓸 수 있는 논문’이 있지 않을까. 타인의 지식, 경험을 부러워할 이윤 없는 거야. 출발선은 다르다. 그리고 각자 뛰는 달림길도 다르다. 내게 주어진 길을 나만의 속도로 완주하는 걸 목표로 하자. 들썩들썩 울렁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수업이 끝난 자유 대화의 방엔 졸업한 선배 두 명이 있었다. 이공학 박사라는 선배는 ‘저는 동기들과 달리 가르치는 학생도 없고, 제가 할 수 있는 연구를 했어요. 오히려 한국어 전공이 아니었기에 새로운 걸 볼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내게 하는 말 같아서 마음이 울컥했다. 채팅창에 메시지를 남겼다.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위로가 됩니다.’ 이 말을 읽은 그녀가 나를 지목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마이크를 켰다. 꾹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 아침 꿈에 교수님이 나왔거든요. (훌쩍) 제가 잘할 수 있을까 싶고. (훌쩍훌쩍) 근데 선배님 이야기 들면서 (훌쩍) 너무 위로가 돼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눈물과 함께 걱정과 불안도 씻겨 내렸다. 누가 그랬나. 나이가 들면 눈물샘이 마른다고, 새빨간 거짓말이야. 순간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생각났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잊은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때 아빠가 물었다.
“어머니, 불가사리 별명이 뭐예요?”
“울보.”
그녀가 옳았다.
‘할머니, 난 지금도 울보인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