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트램을 탔다. 하루의 출발이 좋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버스가 왔고, 지하철, 트램까지 일사천리로 몸을 실었다. 평소보다 20분 늦게 집에서 나왔는데, 이 기운이라면 10분 일찍 학교에 도착할 것이다.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는 학교 근처에서 까페라떼 한 잔을 사는 것에 쓰기로 했다.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카페에서, 99 루블 (한화 1700원)의 큰 사이즈 라떼를 주문하고, 바코드를 찍은 후 커피머신에서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에 가끔 만나면 인사를 나누던 일본인 여성이 보였다. 아침을 먹으려고 테이블에 앉은 그녀도 나도 서로 눈이 마주쳤다.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기엔 촉박한 시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이미, 늦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나도, 커피 사려고 왔어. 잠깐 여기 앉아도 될까?”
“그럼 그럼!”
그녀를 처음으로 본 것은 학기가 시작하기 전 레벨테스트 때였다. 나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유독 그녀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을 수도 있겠다.” 즉, 러시아어 전공의 대학생은 아니고, 남편을 따라 이 곳에 왔으며 생존을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는, 나와 같은 교집합 속에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마침 알고 있던 유학생의 반에 그녀가 있었고, 인사는 나누었지만 깊은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나는 궁금했다. 그녀는 왜 이 곳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을까? 자리에 앉은 김에 먼저 용기를 낸다.
“내 이름은 불가사리예요.”
조심스레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앗,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어디에서 배웠어요?”
“동경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었어요.
벌써 10년 전....(스스로 말하고 놀람)이네요.”
“나도 동경에서 왔어요! 내 이름은 유리코예요.”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 얼마나 러시아어 공부가 어려운지, 앞으로 또 얼마나 이 곳에 있을 계획인지, 서로의 반 친구들은 어떤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릿속에 꽁꽁 갇혀있던 일본어 단어들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러시아어도 일본어도 아닌 단어들을 뱉기도 했다. 10여분의 짧은 대화, 일본에 있던 때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구나.
10년 전 일본에서 보냈던 1년은 내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앞으로 해외에서 살고 싶다” 는 결심이었다. 맏이로 자란 내겐 늘 한 가지 부담감이 있었는데, 착한 딸과 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처음으로 해외에서의 삶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갔던 도쿄 워킹홀리데이는 내게 스스로 지웠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나는 내 깜냥을 알게 됐다. 부모님이 원하는 (돈을 많이 벌어서, 막내의 대학 등록금 한 번 정도 내줄 수 있는, 또는 결혼을 가장 먼저 하여 자리를 잡는) 바람을 할 수 있는 이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종종 적적함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감정만 돌보면 되는 시간에서, 누구의 시선이나 잣대에 신경이 덜한 삶에 자유함을 느꼈다.
2010년 1월 한국에 돌아온 후 시작한 3번째 직장은내 마음과 닿아있었다. 이제는 꿈만 같은, 다시는 못 만날 이들을 전 세계 곳곳에서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가정을 이뤄서 해외에 살게 됐다. 처음으로 지금의 남편의 존재를 엄마에게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그랬다.
“내가 사실 아주 오래전에 사주를 본 적이 있어.”
“아니, 엄마 교회 다니면서 그런 걸 왜 봐?”
“그냥 답답해서 가봤지. 근데 그 할아버지가 첫째가 해외에서 살 팔자라고 하는 거야, 이상했지. 그때는 둘째(나의 여동생)가 일본에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물었지, 바뀐 거 아니에요? 큰 애는 한국에 있는데요. 글쎄 아니라는 거야, 둘째는 한국에 있을 거고, 첫째가 해외를 다닐 거라고 하더라고.”
나는 사주를 믿지 않는다. 다만 엄마는 그 말을 믿었고, 엄마의 확신 덕분인지 나는 이 곳에서 살고 있다. 모스크바의 작은 카페에서, 도쿄에서 온 유리코 상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십 년 전 도쿄 쿠니타치의 셰어하우스를 떠올렸다. 지하철에서 자전거로 20분을 가야 했던 곳, 집 앞에 있던 자동판매기. 오르막길을 올라 골목에 접어들면 보이는 판매기의 불빛에 이제 곧 집이다 안심했었지. 나무계단을 오르면,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있던 아주 작고 작은 방, 그 안에서 몽글 몽글 시작된 나의 바람이 지금 나를 이 곳에 데려다준 건 아닐까. 자, 이제 또 어떤 것을 바라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