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가사리 Apr 16. 2021

햇살과 산책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여보, 지금 몇 시야?”

“아침이야. 오전 8시.”

“캄캄한데, 벌써 아침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이불을 걷고 나와 커튼을 열어 창밖을 본다. 맞은편 쇼핑몰의 네온사인은 반짝이고, 거리의 가로등도 불이 켜져 있다. 여전히 깊고 고요한 밤이다.      


“겨울이면 해가 짧아. 햇빛이 귀하지. 자기가 이 겨울에 익숙해져야 할 텐데...”     


결혼과 함께 남편을 따라 러시아 모스크바에 살게 됐다. 여름보다 겨울, 뜨거운 음료보다 차가운 걸 좋아했기에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을 손꼽아 기다렸다. 바람에 답하듯 10월의 마지막 날, 첫눈이 내렸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눈송이는 더 크고 굵어졌다. 러시아에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없다. 12월엔 매일 눈이 오니까. 창틀에 만든 눈사람은 며칠이 지나도 녹지 않고 곁을 지켰다. 러시아의 겨울, 또 하나가 없다. ‘따스한 햇살’이다. 겨울의 하늘은 종일 흐리고 우중충했다. 색색의 물감을 묻힌 붓을 물통에 휘저어 뿌옇게 된 하늘색이다. 처음으로 햇빛 없는 겨울을 보내며 울적해하자 남편이 말했다.


“올해 날씨는 좋은 편이야. 작년 12월 일조량은 6분이었어.”

“세상에. 한 달 동안 햇살이 6분만 비쳤다는 말이야?”      


해가 없어도 눈이 오면 밖은 환하고 밝았다. 견디기 힘든 건 비가 내릴 듯 말 듯, 눈이 올 듯 말 듯 한 애매모호한 날씨였다. 흐린 날이 지속되면 우울해졌다. 이도 저도 아닌 나를 닮은 것 같아 더 그랬다. 8년간 다닌 직장을 접고 다시 늦깎이 학생이 된 나. 러시아어는 배워도 제자리걸음, 굳은 표정의 러시아인들 앞에 입도 귀도 뻥긋 못하는 나. 결혼했지만 아이도 일도 없는 무소속 이방인이 된 나. 이대로 좋은 걸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남과 비교하며 나 홀로 멈춰버린 시계처럼 느껴질 때면, 두 손이 시침과 초침이라도 되듯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으로 오븐을 열어 빵을 굽고, 코바늘에 털실을 꿰어 무릎 담요를 만들었다. 긴 겨울을 나던 어느 날, 하굣길 트램에서 러시아인 안나를 만났다. 길을 묻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인사를 나눴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차를 마시는 사이가 됐다.      


“고향 집의 정원에서 가져온 잎이야. 홍찻잎과 같이 섞어서 내려줄게.”      


그녀가 정성스레 내려준 차와 함께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씁쓸했던 마음까지 달콤한 기운이 전해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창밖으로 햇살이 반짝였다.      


“햇볕이다. 우리 산책 가자!”

“밖에 바람도 불고 쌀쌀한 것 같아.”

“바닥에 눈이 없잖아.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야.”      


내겐 ‘쌀쌀하여 감기 걸리기 십상인 우중충한 날’이지만, 매일 눈이 내리는 모스크바에서 눈으로 덮이지 않은 맨땅은 ‘산책하기 좋은 날’이고, 거기에 햇빛이 찾아왔다면 ‘산책을 가야 하는 시간’이다. 이곳에서 겨울의 햇살은 슈퍼마켓의 반짝 세일과 같다. 언제 또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금세 사라질 햇살을 쬐러 길을 나섰다. 공원에는 엄마 손을 꼭 잡은 아이, 팔짱을 낀 연인, 모자와 장갑을 낀 할아버지까지 모든 연령의 러시아인들이 그들만의 산책을 즐기고 있다.      


“산책하니까 좋지?”

“응.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

“러시아의 길고 긴 겨울을 잘 보내려면 산책이 중요해.”      


처음 맞는 러시아의 겨울, 산책을 좋아하게 됐다. 햇살이 비치면 하던 일을 접고 밖으로 나간다. 목적지가 없는 산책이다. 이전의 나는 회사를 가려고,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제 산책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둔다. 매일 걷는 길이라도 단 하루도 같은 풍경은 없다. 땅 위로 올라온 호수의 오리들, 하얀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인 나무, 그 나무 아래 쉬고 있는 눈사람, 아빠가 끌어주는 썰매를 타는 아이들, 매일 다른 그 날의 풍경이 내게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타인의 칭찬이나 보상이 없는 일상이어도, 복사하여 붙이기 같은 날들이라도 괜찮아.’ 언젠가 이 시간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알지 못해도 좋다. 햇살을 쬐는 순간의 산책.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니까.      





올해 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닮고 싶은 글을 쓰는 고수리 작가님에게 '내가 좋아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보냈다. 햇빛이 없는 모스크바의 겨울은 울적한 날이 많았다. 퇴사와 결혼, 해외이주, 삶에 큰 변화가 있던 해였다. 홀로 멈춰 있는 시계처럼 느껴질 때면 일기를 쓰고, 목적지 없는 산책에 나섰다.  스스로 다정한 이가 되고 싶어서 애쓰던 나의 겨울들, 작은 글과 그림이 실린 책 한 권이 봄과 함께 나에게 왔다.   

책에는 '햇살을 쬐는 순간의 산책' 이란 제목으로 :) + 작가님의 다정한 코멘트 잊지 않을게요.


+ 동아일보 칼럼(고수리 작가님)에 소개된 39인의 에세이스트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십 년 전의 바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