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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Apr 30. 2021

약이 되는 말

나에게 힘이 되어준 한 마디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상담을 받던 때가 있었다. 사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의 양은 끝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만나는 선생님 앞에서 밑 빠진 독처럼, 쉬지 않고 눈물이 쏟아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렁이던 마음도, 눈물도 조금씩 잔잔해졌고 상담을 종료했다. 마음에 고인 슬픔과 분노를 쏟아냈던 그 시간덕분에 일상을 견딜 수 있었다. 다시 상담 선생님을 찾은 건 결혼과 출국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잘 지내고 있었죠? 결혼을 한다고요?” 

“네, 선생님. 제가 결혼과 함께 해외로 가게 되었어요.”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많은 남자 친구는 연애하는 내내 나를 품어주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과 걱정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이것은 그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나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이 마음이 나의 어디에서 싹이 나서 점점 자라고 있는지, 그 뿌리를 찾고 싶었다. 다시 일주일에 한 번 그녀를 만났고, 처음과 달리 나는 많이 울지 않았다. 스스로 꽁꽁 감춰버린 내 안의 작은 아이를 발견하는 일, 그 모습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품어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상담이 이어질수록 나는 사람들에게 ‘수용을 받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인 걸 알게 됐다. 수용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나, 나이에 맞게 자라지 못하고 멈춘 작은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용기가 필요했다. 두 번째 상담은 결국 나의 자아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약속된 횟수의 상담이 끝나는 날, 선생님은 말했다.      


“불가사리씨, 한 직장에서 8년의 경험은 무시할 수 없어요. 큰 회사에서 버텼다는 건 다른 공간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봐요. 미래에 대한 상을 자신 있게 가져가도 좋을 거 같아요. 간신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연륜, 사회적 경험, 여러 가지가 불가사리씨 안에 있으니까, 어디를 가든지 잘 살 수 있어요.”      


선생님의 따뜻한 말에 나는 다시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한 개인에게 요구하는 건 러시아보다 많을 수 있다며, 어쩌면 요구사항이 없는 단 둘만의 공간, 새로운 삶은 내게 의미 있고 신선할 수 있다고 그녀는 출국을 앞둔 나를 격려해주었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정든 회사를 떠나는 건 홀가분하면서도 불안했다.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 곁에 있었지만, 익숙하고 친밀한 공동체를 떠나 해외의 삶을 시작하는 건 설레면서도 조금은 두려웠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미리미리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고 이중적인 감정들 앞에 끙끙대며 버티던 마음에 선생님은 약을 발라 주셨다.      

 

대학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요즘, 그때의 그 말은 다시 나에게 약이 된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의 초보, 수업에서 듣는 국문학, 교육학적 용어들은 낯설고 이미 현직에서 오래 교사로 일하면서 시간과 경험을 쌓은 동기들을 보면 작아질 때가 많다. 오래전 상담 노트의 말을 꺼내 읽으며 '같은 길은 아니지만, 다른 길에서 쌓은 나의 시간의 힘을 조금 믿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사고의 전환이 생겼고, 그들과 내가 같을 수도, 같아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상담 선생님이 해준 말과 함께 주임 교수님이 이야기한 ‘양질 전환의 법칙’이라는 말도 약처럼 꿀꺽 삼킨다. <양질 전환> 이란 '양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쌓이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살다보면 시간을 쌓아야 하는 때가 있다. 나의 지금이 그렇다. 시간을 보내며, 양을 쌓아야 하는 시기라는 걸, 원하는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8년간 한 회사에서 버텼던 힘으로 이 길에서도 잘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꾸준과 성실함으로 천천히, 길가에 핀 꽃과 하늘도 보면서 걸어가고 싶다.           


© josealbafoto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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