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어요

아이디어가 필요한 날

by 불가사리


대학교 4학년,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변의 친구들은 일찌감치 언론고시 스터디를 시작했고, 아예 전공과 무관하게 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면서, PD가 될 자신은 없었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을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그런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은 매일 더 깊어졌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래 흘러가는 자막 한 줄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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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제00회 수강생을 모집합니다. 원서는....

방송작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짝은 ‘라디오 작가’가 꿈이라고 했다. 글이 아닌 말을 쓰는 직업, 라디오 디제이가 하는 말은 방송작가가 써주는 대본을 자연스럽게 읽는 것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누군가의 말을 쓰고, 그 말을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일, 방송작가란 그런 것이구나.

자막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뛰었다. 저곳에 가면, 내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들을 꺼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마음 깊이 꽁꽁 숨어버린, 내 안의 잃어버린 말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국방송작가교육원에 등록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여의도에서 수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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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방송작가가 꿈이야?”
“아직 잘 모르겠어. 다만 마음의 말들을 꺼내서 쓰는 걸 배우고 싶어.”


그곳에서 만난 J는 먼저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학부 전공도 같았고, 생각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교육원의 기초과정을 끝내면서 드라마 단막극 한 편을 써내야 했다. 말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과, 직접 대본을 쓰는 일은 천지차이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간신히 한 편의 드라마 대본을 썼다.

“J 야, 나는 드라마 작가는 못하겠다.”

“나도 그래. 연수반은 구성작가 과정을 들을 거야.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어.”

“나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나는 인간극장과 같은 휴먼다큐 프로그램이 좋았다. 사람의 인생만큼 다채로운 것이 있을까? 방송을 보며 나는 같이 울고, 같이 웃었다. 기초반을 졸업한 우리는 나란히 구성작가 연수반에 등록했다. 매주 우리에게는 과제가 주어졌다. 라디오의 경우 오프닝 대본을 필사하고, 직접 써보는 것이었고, 예능은 개그콘서트의 한 꼭지를 구성하고, 대본을 쓰는 것이었다. 비 드라마 구성작가 수업은 매 시간 새롭고 흥미로웠다. 드디어 가장 기다리던 다큐/교양 프로그램의 수업이 열린 날, 오래 이 분야에 몸 담고 있던 작가님은 첫 수업에서 이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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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좋은 아이템은 어떻게 찾을까요?

세상이 창조된 이래, 새로운 것은 없어요. 다만 새로운 시각이 존재할 뿐이죠.”

나는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매주 과제를 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쪽 분야의 일은 노력보다 재능이 중요한 건 아닐까, 신이 선택한 몇몇에게 주어진 재능, 글과 말을 쓰는 업은 선택된 소수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에 용기가 났다. 나도, 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눈과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연스레 방송작가로 일하다가, 이직하여 회사의 콘텐츠를 만들고, 캠페인을 기획하는 일을 했다.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막막하고 자신이 없을 때면 그 날, 여의도의 작은 강의실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새로운 것은 없어. 새로운 시각이 존재할 뿐이야.’


묘하게 그 말은 다시 힘을 내서, 또 한 번 부딪쳐볼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그리고, 이미 창조된 이 세상에서 보물찾기 하듯 눈과 마음을 열어보자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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