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북 식량 지원으로 다시 움직이는 한반도 시계
잠시 멈췄던 한반도 시계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7월9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7월 하순~8월 북·중 육로 무역 재개’ 소식을 알린 데 이어 7월11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친서를 교환했다며 전문을 공개했다. 그런데 친서의 핵심 내용이 지난 3월23일 공개된 양 정상의 친서와 같았다. 특히 시진핑 주석의 친서 내용이 압권이다. 3월23일 공개된 시 주석의 친서는 “(시 주석이) 두 나라 인민에게 보다 훌륭한 생활을 마련해줄 용의가 있다”라는 매우 이례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력갱생의 한길로 나선 주체의 나라’라는 북한 인민의 행복을 아무리 동맹이라 하지만 시 주석이 마련해준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7월11일 발표된 시 주석의 친서에도 똑같은 내용이 글자만 조금 달라진 채 들어 있었다. “두 나라와 두 나라 인민에게 더 큰 행복을 마련해줄 용의가 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보다 훌륭한 생활’이 ‘더 큰 행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외교 관례에도 맞지 않는 이런 구절을 중국 측이 잘난 체하려고 넣은 것 같지는 않다.
3월 친서의 해당 구절은 당시 북측이 요구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그 전해인 2020년 북한의 ‘용역(남북 연락사무소 폭파)’에 관한 대가를 애초 약속한 대로 지불하지 않자 북측이 구두로는 못 믿겠다며 공개적인 약속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 주석 친서의 저런 표현으로 등장한 것이다. 3월의 친서는 4월 중순에 감행될 예정이었던 북한의 무력시위(3000t급 잠수함 진수식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발사)의 대가로 중국 단둥역에서 식량 및 생필품, 의약품 등을 싣고 평양으로 출발하기로 한 ‘평양행 특급열차’와 관련된 시 주석의 보증 각서나 다름없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자세한 경과는 〈시사IN〉 제714호 ‘중국에서 평양으로, 원조물자 실은 열차가 멈춘 까닭은?’ 기사 참조). 그렇다면 이번 친서 내용 역시 7월9일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7월 하순~8월, 북·중 무역 재개’와 직결되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이 신문은 “북한 정부 관계자가 7월 하순부터 8월에 걸쳐 철도를 이용해 무역을 재개할 것이니 준비하라고 무역 관계자들에게 통보했다”라고 전했다. 즉 ‘단둥에서 신의주까지 식량, 화학비료, 약품을 보낸 뒤 전용 시설에서 보름 동안 보관한 뒤 북한 각지로 다시 보낼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 북한이 코로나19로 봉쇄됐던 북·중 국경을 개방하고 무역을 재개하겠다는 뜻인가. 〈요미우리신문〉은 기사에서 ‘(중국 측의 식량·생필품·의약품 지원이 이뤄진다 해도) 북·중 무역관계가 재개될지는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뭘까. 바로 북한의 식량난과 관계가 있다. 지난해 홍수해와 태풍,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봉쇄조치 등으로 북한은 올해 식량 약 100만t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관련 단체들은 식량난으로 인해 8월에서 10월 사이 북한에 인도주의적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왔다. 이 위기를 모면하려면 급한 대로 최소 20만t(북한이 매년 외국에서 들여오는 규모인데 올해는 수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의 식량이 당장 필요하다고 한다.
중국이 지원하면 북한은 한다.
그중 10만t을 중국이 지난 5월 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중국이 이렇게 결정한 데에는 4월 중순에 약속을 못 지킨 데 대한 미안함과 함께 또 다른 속내가 있다고 봐야 한다. 시진핑 주석 방북 2주년 기념일인 지난 6월21일을 전후해 리진쥔 북한 주재 중국 대사와 쑹타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입을 모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북·중 양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중국의 요구사항이 뭔지 그 말 속에 잘 드러난다. ‘지역의 평화와 안전’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북한이 무력도발을 통해 자국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분산시켜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지난 5월 말 지원이 결정된 식량 10만t이 이번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면 앞뒤가 맞다. 중국이 ‘주겠다’고 말만 해왔던 식량의 지원 시기가 7월 하순에서 8월 사이로 잡힌 것이다. 왜 하필 이때인가? 식량 위기가 8월부터 본격화된다는 점도 감안했겠지만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바로 8월의 한·미 연합훈련이다. 4월 중순 움직이려 했던 단둥발 평양행 특급열차도 그 모멘텀은 3월의 한·미 연합훈련이었다. 한·미 연합훈련을 빌미로 북한이 반발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그 대가로 중국이 식량을 지원하는 구도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발표에 따르면 올해 한·미 연합지휘소훈련(CCPT)이 8월10일부터 27일까지 열리기로 예정돼 있다. 한·미 훈련 뒤 북한의 도발, 중국의 식량 지원이란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7월11일 〈조선중앙통신〉에 공개된 시진핑 주석의 친서는 ‘식량 지원한다고 해놓고 지난번처럼 일방적으로 취소하기 없기’라는 북한 측 요구에 대한 공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친서 내용 중 지난번과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지난번 친서에서는, 중국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새로운 적극적인 공헌을 할 용의가 있다’는 말이 앞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북한의 무력시위로 긴장이 고조되면 중국이 나서서 중재할 용의가 있다는 의중을 드러냈으나 그 뒤 몇 달 지나는 동안 미·중 관계가 그런 얕은 수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는 점을 반영한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이 북한에 바라는 것은 ‘한반도라는 인화점에 하루빨리 불을 붙이라’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미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지난 6월16일 미·러 정상회담까지는 바이든 정부의 외교가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미·일,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G7 정상회의, 나토 정상회의까지 쾌속으로 이어지다 6월16일 미·러 정상회담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 뒤로는 소강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 바이든 외교의 진행 과정을 추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 바퀴 돌아 결국엔 북핵 문제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든 팀이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을 서둘러 추진했던 이유도 바로 그 입구와 출구를 마련하는 데 러시아의 역할이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미·러 정상회담의 단초를 연 5월19일의 미국 블링컨 국무장관과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 회담에서 블링컨 장관은 양국이 협조할 지역 현안으로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와 아프간 문제를 거론했다. 북한·이란·아프간이 미국이 당면한 지역 현안인 셈이다. 미·러 정상회담 직후 바이든 대통령 표현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가 ‘두 강대국 관계’가 되느냐 여부는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이들 현안을 해결하는 데 러시아가 얼마만큼 기여하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두 강대국 관계’는 바로 G2를 의미한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오바마 정부가 급한 나머지 중국을 G2의 반열에 올려줬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까지 제치고 G1이 되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미·중 관계가 파탄 나버린 것이다. 이제 미국은 중국이 아닌 러시아를 미국의 명실상부한 국제 파트너인 G2로 대접하려고 한다. 중국 대신 러시아를 G2로 끌어올리려 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였다. 그러나 끝내 그 꿈을 못 이루고 바이든이 그 구상을 잇겠다고 나선 셈이다.
중국이 주목하는 ‘글로벌 3대 인화점’
그렇게 되려면 러시아가 이란·북한·아프간 문제에서 역량을 발휘해 미국에 협조해줘야 한다. 그런데 정반대 상황이 미·러 정상회담 직후 이란에서 벌어졌다. 6월19일 이란 대선에서 강경파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법조계 인물인 라이시는 이란 국내의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로 ‘테헤란의 도살자’라 불린 인물이다. 2019년에는 미국 정부의 제재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이란 대선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통제하는 헌법수호위원회가 사전에 후보자를 걸러낸 뒤 거행된다. 즉 라이시의 당선은 하메네이의 의중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라이시의 당선은 충분히 예견되었기에 미국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핵협상에 강경한 자세인 라이시의 임기가 시작되는 8월 초 이전에 이란의 핵합의(JCPOA) 복귀를 서두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 6월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란 핵합의 복귀를 위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첫날 회의를 마치자마자 이란 대표단이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언제 다시 회의가 열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회담을 서두르려던 미국이나 유럽의 의도가 완전히 불발된 것이다.
이런 와중인 6월20일 당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대(對)러시아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야권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독살 시도에 대해 다시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미국은 지난 3월에도 이 건과 관련해 제재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설리번은 또한 러시아가 독일과 함께 추진 중인 가스관 사업 ‘노르트 스트림 2’에 대해서도 제재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바로 며칠 전 화기애애하게 정상회담까지 한 사이가 맞나 싶게 미국 측이 러시아에 느닷없이 강경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러시아 측도 당연히 당혹스럽고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이 같은 입장 선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이란 관계의 내막이나 러시아의 속셈을 알면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뜻은 분명하다. 러시아가 이란·북한·아프간 문제 해결에 협조하면 러시아를 G2로 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처지에서 보자면 ‘G2로 대접받기’보다 먼저 해결돼야 할 사안들이 있다. 우선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병합한 이후 미국과 서방세계로부터 각종 제재를 받아왔는데 이를 풀고 싶다. 또한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전개 중인 미국의 군사활동도 러시아로서는 몹시 거슬리는 움직임일 것이다.
러시아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그대로 남은 상황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의도대로 이란의 핵합의 복귀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러시아는 중요한 카드를 잃게 된다. 이란은 특히 대미 관계에서는 아직까지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동의 없이 이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6월20일 이란 대표단의 철수 과정에도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의 개입이 있었다고 미국 측이 판단했기 때문에 ‘점잖아’ 보이는 설리번 보좌관이 입에 거품을 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한반도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국제사회가 북핵 문제를 논의 테이블 위로 끌어올리는 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다. 바이든 팀의 원 구상은 이란을 핵합의(JCPOA)로 복귀시키고 여세를 몰아 북핵 문제 역시 다자 협의의 틀로 집어넣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란이 나자빠지고 거기에 러시아 문제라는 변수까지 등장한 셈이다. 다만 러시아가 판을 깨겠다는 게 아니라 ‘밀당’을 하자는 것이므로 어떤 식이든 돌파구는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란의 핵합의 복귀가 늦어진다면 한국으로서는,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이란 문제에 앞서 북핵 문제를 다루는 식으로 순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상의할 문제다. 또한 북핵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오르기까지 남는 시간의 정세 관리를 어떻게 할까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정세 관리가 왜 필요한가. 한국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지금 북핵 문제 또는 북한 문제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전개하는 ‘그레이트 게임’의 중요한 한 축이 바로 북핵과 북한 문제다. 중국의 군사전략가들이 주목하는 ‘글로벌 차원의 3대 인화점’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한반도, 그다음은 남중국해, 마지막이 중앙아시아 국경지대다. 중국을 기준으로 순서를 붙였는데, 인화점이란 불이 나기 쉬운 곳이라는 의미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불이 나도록 만들고 싶은 곳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지난 2년간 중국이 북한을 매개로 집요하게 획책해온 전술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중국 입장에서 자신에게 피해가 없으면서 뭔가 터졌으면 하고 바라는 1순위 지역이 바로 한반도다. 한반도는 북한이라는 엄연한 실체가 있기 때문에 뭔가 터지면 북한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과 중국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달을 것이다. 정말 위험한 충돌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양국이 이 지역에서 충돌할 가능성은 낮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양측이 각각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시진핑 주석이 임기 내에 ‘타이완 통일’을 원한다고 보도한다. 중국의 타이완 무력 침공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시 주석이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최근에도 ‘중국을 노리는 외부의 적은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가 날 것이다(頭破血流·두파혈류)’라고 일갈했지만, 원래 시끄럽게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다.
세 번째 인화점이 중앙아시아 국경지대인 이유는 무엇일까? 순서상 중국으로서는 가장 위험해서 피하고 싶은 일인 듯한데 그게 뭘까.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미군의 아프간 철수다. 이미 19세기부터 아프간은 ‘어떤 외세든 일단 들어갔다 하면 죽어 나오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소련 군인들을 도륙한 시신을 산 위에서 던지며 저항하는 무자헤딘 반군들 앞에서 소련의 공산당 정부는 지옥을 맛봤다. 아프간을 ‘제국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조차 점잖은 표현이다. 19세기 영국, 20세기 러시아, 그리고 21세기 미국 등 당대의 최강국이 아프간 사람들의 사냥감이 됐다.
사실 아프간 전쟁은 오바마 정권 때 이미 끝났다. 전쟁 초기 미국 측은 카불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서 탈레반을 전부 쫓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탈레반 주력은 파키스탄 북부 산악지대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에 정신 팔고 있는 사이에 소리 소문 없이 아프간 전역을 지방부터 하나하나 잠식해 들어갔다. 미국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다만 오바마나 트럼프나 자기 임기 내에 ‘제2의 사이공’ 같은 악몽이 재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폭탄 돌리기’를 계속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바이든이 과감하게 단절시켰다. 지난 4월15일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수를 선언한 것이다. 이 조치는 그다음 날부터 시작된 미·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유럽 순방 등으로 이어지는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 행보에 시동을 거는 것이었다. 바이든의 외교 행보가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그 첫 번째 조치인 아프간 철수 선언 역시 ‘패전에 따른 철수’보다 ‘중국 공략의 출발점’에 초점을 맞추고 볼 필요가 있다.
사실 미국 측은 이미 트럼프 정부 말기부터 중국을 공략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해왔다. 지난해 11월 미국 국무부는 아프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반중 독립운동단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테러단체 지정에서 해제했다. ETIM은 1990년대 창립 이래 중국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벌여왔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중국이 미국의 반테러 전쟁에 공조한 것도 바로 이런 단체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하면서 신장웨이우얼 무장 독립운동단체의 테러단체 지정을 해제한 것이다.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미국이 신장웨이우얼의 독립을 지지하고 뒤에서 도울 준비가 됐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된 움직임이 있다. 지난해 12월, ETIM 요인 암살을 위해 카불 일대에서 암약하던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요원 10여 명이 아프간 정보국에 체포되었다. 풍문으로만 돌았던 중국의 비밀공작을 백일하에 드러낸 사건이다. 올해 2월에는 영국 BBC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강제수용소 실태를 탈출자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폭로했다. 미국 측은 신장웨이우얼의 위구르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중국 기업들을 자국의 제재 리스트에 계속 올리면서 이 문제를 이슈화하고 있다.
북한, 중국 의도 알지만 대안이 없다
바이든 정부의 의도는 분명하다. 미군이 빠져나가면서 졸지에 적을 잃은 탈레반과 전 세계 수니파 원리주의 세력의 막강한 전투력을 중국 쪽으로 돌리는 일이다. 분위기는 이미 성숙했다. 중국은 미군과 나토군이 중국 신장웨이우얼과 접경인 아프간 동부를 지켜주는 데 안심한 나머지 2015년부터 신장웨이우얼에 위구르인 100만여 명을 감금할 수 있는 강제수용소를 짓고 종교탄압 및 인종말살 행위를 자행해왔다. 그전 같으면 중국에 아무 원한이 없을 탈레반과 알카에다, IS(이슬람국가) 같은 수니파 이슬람 과격 세력들이 같은 수니파 ‘형제’들인 위구르인에 대한 중국의 탄압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카에다와 IS는 중국에 대해 지하드(성전)를 선언했다.
신장웨이우얼 지역에서 탈출한 ETIM 세력은 그동안 탈레반과 함께 아프간 내전에 활발하게 참여해왔다. 이들이 앞으로 미군 철수 이후 중국과 접경지역인 아프간 동부와 파키스탄 북부 산악지역을 장악할 공산이 크다. 중국에는 엄청난 위협이다. 중국은 2015년부터 파키스탄의 과다르항부터 카라치를 거쳐 신장웨이우얼의 카스에 이르는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을 건설 중이다. 이 회랑은 파키스탄을 관통하다가 최북단인 길기트발티스탄주에 이르러 아프간의 와칸 회랑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와칸 회랑의 긴 구간은 350㎞에 이른다. 그 구간의 끝에 중국과 아프간 사이의 76㎞짜리 국경선이 존재한다.
즉, 탈레반과 ETIM 세력이 이 일대를 장악하면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내에 가설된 송유 가스관을 공격해 파괴하는 것이 매우 쉬워진다. 파키스탄의 과다르항에서 카라치를 거쳐 카스까지 이르는 이 송유관은 중국에게 매우 중요하다. 중국이 이란산(내지 중동산) 원유를 유사시 봉쇄의 위험이 있는 믈라카해협 이외의 경로로 공급받을 수 있는 중요한 생명선이다. 이 경로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인민해방군 전략가들이 세 개의 인화점 중 제일 후순위에 놓은 아프간 미군 철수를 특히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지켜보는 이유다. 현재 아프간의 수도 카불 남동쪽 40㎞ 지점에는 중국 기업이 약 30억 달러(약 3조3600억원)를 들여 개발 중인 메스아이나크 구리광산이 있는데 탈레반이 카불을 접수하면 이곳의 운명도 위태로워진다.
앞에서 언급한 세 인화점 중 한반도는 중국이 미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2년 전부터 불장난을 해온 지역이다. 이제는 미국 차례다. 미국은 아프간 철군을 통해 중국의 서부 중앙아시아 일대 국경선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그 방법도 너무나 간단하다. 예정된 스케줄대로 미군이 빠져주기만 하면 된다. 원래 9월11일까지 빼겠다고 했다가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8월31일로 철군 완료 시점을 앞당겼다. 지난 7월2일에는 아프간의 미군 거점인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전 병력이 홀연히 철수해버려 아프간 정부군을 당황케 하기도 했다. 미국 정보기관들 판단으로는 미군이 빠진 후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의 공세 앞에 6개월을 못 버틸 것이라고 한다.
그때부터 중국에 지옥문이 열린다. 최근에는 미군과 나토군이 빠진 공백을 중국군이 평화유지군 명목으로라도 메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중국 내에서 일고 있다. 미국은 매우 환영하는 눈치다. 중국도 한번 당해보라는 것이다.
북한 문제는 지금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한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다. 중국의 대북한 식량 지원은 ‘인도적’ 의도를 깔고 있거나 혹은 ‘북한 인민의 행복을 위한 것(시진핑 주석)’이 아니다. 중국은 자국에 일어날 불길을 외부의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그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한 측이 중국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고 보이는 점이다. 다만 뭔가 지원받을 수 있는 나라가 중국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주는 것을 받으며 불을 지르면서도 너무 큰불로 번지지는 않도록 나름 신경을 쓴 흔적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까지 한반도의 안보를 궁지에 처한 북한의 처분에 맡겨둬야 하는 것일까? 북한은 또 언제까지 지금처럼 살아갈 것인가? 중국에 기대지 않고도 북한이 살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