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이 어제(6월22일) 발표한 담화의 여진이 계속되는군요. 김여정 담화는 지난 6월17일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총비서가 대화에 방점을 찍은 듯한 발언을 한데 대해 미국 측이 반응을 보이자 '꿈 보다 해몽'이라며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오늘자 <조선신보>는 여기서 한술 더떠 당시 전원회의에서 김 총비서가 한 '조선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라는 말은 북한이 중국과 하나의 참모부로 뭉쳐 철두철미 공조하겠다는 뜻이라며, 묻지도 않았는데 지레 해명까지 하더군요.
이게 뭔가 싶습니다. 김 총비서 발언이 너무 앞서 나가서 북한 식으로 줏어담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김 총비서가 말을 잘못 했다는 것인지. 그의 발언 내용은 누가 봐도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뿐 아니라 중국 전문가들조차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김여정 담화나 조선신보의 다소 TMI스러운 해석은 뭔가. 수령이 이미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은 마당에 아무리 백두혈통의 공주라 해도 그것을 부정하는 얘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신보는 더 말 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우리가 대화에도 문을 열었다고 해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니 미리 김치국부터 마시지는 마라는 정도의 얘기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담화에서는 미국 백악관의 설리번 안보보좌관이 흥미롭다고 한 반응을 물고 늘어졌지만 실제로는 최근 한국을 방문한 성김 북핵담당대표가 아무 조건없이 만나자고 한 게 더욱 귀에 거슬렸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대북 적대시 정책의 폐기'를 대화의 조건으로 진즉에 내걸었는데 조건없이 만나자니요. 우리가 대화라는 단어를 꺼내놨다고 너무 하는 게 아니냐, 아마 억장이 무너젔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북한은 여전히 '대북 적대시 정책 폐지'를 대화의 조건으로 삼고 있을까요? 아마 당분간은 이 얘기를 계속 할지도 모릅니다. 기 싸움에 필요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 반복하는 것만큼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것도 없을 테니까요. 사실 대북 적대시 정책 폐지란 말은 북측에 의해 단 한번도 이게 무슨 뜻인지 정의된 바가 없습니다. 미국이 그동안 북한을 적대시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한 것만 해도 꽤 여러차례일 것으로 기억하는데 북은 주구장창 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저 말의 뜻이 주한 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니다 주일 미군 철수도 포함된다 등 억측만이 구구합니다. 한마디로 대화나 협상의 조건이 되기에는 적절하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북한이 저 말을 전면에 내걸면 당분간 대화할 생각이 없구나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한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바로 식량난 때문입니다. 지난 6월14일 발표된 세계식량기구(WFO)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식량 부족분이 85만8천톤이라고 합니다. 이는 북한의 두세달치 식량에 해당하는 것인데 앞으로 부족분을 수입하거나 원조를 받지 못하면 올해 8월~10월 사이에 북한 가정들이 혹독하게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최근 통일연구원이 발표한 전원회의 분석 보고서는 좀더 구체적입니다. 북한 당국이 그동안 쌀가격은 어떻게든 안정을 시켜왔는데 그 쌀가격이 올해 춘궁기 0.5~0.6달러에서 최근 0.9~1.4달러까지 급등했다고 합니다. 쌀공급이 전반적으로 부족해져 당국의 개입이 한계에 부딪한 것 같다는 것이지요. 3분기에 해외 수입 또는 인도적 지원이 안되면 식량 가격은 계속 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역이나 계층에서 `인도주의적 위기'의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주의적 위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오죽 급했으면 지난 6월15일~18일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식량부족 사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해결책을 촉구했겠습니까. 당시 김 총비서는 인민생활 안정을 위한 특별명령서를 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의 수해와 태풍 피해,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비료 수입 급감 등의 재해로 인해 발생한 일을 특별명령을 내린다고 해결이 되곘습니까?
저는 그당시 그 광경을 보며 묘한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이 전원회의를 개최한 기간은 6월15~18일 입니다. 북한은 미국의 부탁을 받은 러시아 측의 전언으로 6월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바이든-푸틴간의 미러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사실뿐 아니라 관련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즉 6.15~18일이라는 전원회의 기간은 곧 그 사이에 놓이게 되는 미러정상회담을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김총비서가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니 대화와 대결이니 한 발언도 미러 정상회담이후 푸틴과 바이든의 기자회견으로 정상회담 결과가 어느 정도 알려진 이후 나온 발언입니다. 즉 정상회담 결과를 반영해서 대화쪽으로도 문을 열어놓겠다는 결심을 밝힌 것이지요. 하필 그 와중에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식량 사정의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토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북한이 빠르면 한달 앞으로 다가온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두가지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해외에서 사오거나 원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엔 안보리 제재가 본격화한 2018년 이후 매년 외화 수입의 80%가 제재 전 비해 날아간데다 코로나 이후 국경을 아예 닫아건 이후는 경제 자체가 마비됐습니다. 한 마디로 외화 기근 상황인지라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말은 못하지만 누군가 통 크게 지원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지요.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는 왜 하필 그때 전원회의를 열었을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년초부터 당대회를 열며 자력갱생을 외쳐왔음에도 당 전원회의라는 공공연한 자리에서 식량 사정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보는 광경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저 신호를 잘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지원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진핑 주석 방북 2주년인 6월20일 직후에 북한과 중국이 기념사진전-평양 및 북경주재 대사들의 신문 기고-북중 공동좌담회 같은 전에 안하던 행사들을 열며 미중 패권 다툼시대에 걸맞는 모종의 메시지를 발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북중 두나라가 손을 잡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열심히 내놓는 쪽은 주로 중국이고 북한은 장단을 맞춰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중국이 지역의 평화 운운하는 말을 꺼내면 경계를 합니다. 북한 앞세워서 또 무슨 일을 벌이려 저러나 싶은 거지요.
참 이상한 기분이 들더군요. 중국이 저럴 때가 아닐 텐데 싶었지요. 지난 4월 중순 단둥에서 평양으로 식량과 원조물자를 실은 특급열차를 보내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했다가 미국이 흔든 대만카드에 놀라 약속을 안지킨 게 바로 중국입니다. 당시 북한은 중국의 약속을 믿고 신포에서 일련의 무력시위를 벌이려 준비했다가 그만 둘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니 중국이 북한 앞에서 큰 소리 칠 때가 아닌데 왜 저러나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좀 알아보니 사연이 있군요. 북한이 올해 부족한 약 86만톤 중 당장 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것은 약 20만톤 정도라고 합니다. 이 20만톤이 그동안 해외에서 수입해온 물량인 셈이지요. 이중 10만톤 가량을 중국이 지원하기로 지난 5월 말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4월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북한을 다독이기위한 차원이겠지요. 지난 5월27일 왕이 외교부장이 리용남 주중 북한대사를 조어대로 부르더니 그 얘기를 한 게 아닌가 싶군요.
그런데 북한이 필요한 건 20만톤입니다. 중국이 주겠다고 하는 건 그 절반인 10만톤입니다. 나머지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한이 우리 말을 잘들으면 주겠다 이거지요. 중국이 늘상 하는 수법입니다. 지난 21일자 노동신문에 리진쥔 주북 중국대사가 "중국이 조선과 함께 평화를 수호하고 미래를 공동으로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한 말의 진의가 뭔지 또 그 다음날 쑹타오 중국 대외연락부장이 리용남 대사와의 이례적인 공동좌담회에서 "쌍방의 공동이익과 세계평화를 수호"하자고 한 말의 뜻이 뭔지 생각을 안해볼 수 없는 것이지요. `지역과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 일'에 북한이 나서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압박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뭔지는 설명 안해도 아실 겁니다.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주체의 나라 조선'이 어쩌다 저 지경까지 돼 버렸는지. 지역과 세계의 평화는 북한과 중국이 손을 잡아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1,2년 벌어진 일들은 그 반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북한이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 지역과 세계까지는 몰라도 한반도의 평화는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식량 20만톤 우리가 주고 곧 위기에 처할 동포도 구하고 북한이 더이상 원치 않는 지역질서의 교란자 역할을 그만 두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5월21일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합의한 바 있지요. 당시 미국 고위당국자는 기자들과 전화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최대한의 유연성(Maximum Flexibility)'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그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할 때입니다. 북한의 자존심과 체면을 배려하되, 저들이 더이상 인간실존의 최소한의 권리인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타국으로부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강요당하는 상황을 막아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