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대전략 변화와 아프간 철수, 그리고 북미관계
한국행을 희망한 아프간인 협력자 391명을 전원 구출할 수 있었던 한국 정부의 ‘미라클 작전’에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8월22일 열린 아프간 관련 20여국 외교차관회의에서 한국행을 희망하는 아프간 협력자 전원을 버스에 태워 카불 시내를 통과하게 하자는 해결책을 제시한 게 바로 그였다는 것이다. 미국과 거래하는 아프간 버스회사에서 버스를 대절해 협력자들을 태우고 미군과 탈레반이 함께 근무하는 검문소를 통하면 탈레반의 제지를 뚫고 카불 공항까지 무사히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불 공항까지 그들을 데려올 방법을 찾지 못하던 암담한 상황에서 그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이로서 그는 자신이 힘들었던 순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던 ‘특별한 선물’에 대한 답례를 톡톡히 한 셈이다.
웬디 셔먼과 미라클 작전
지난 7월25~26일 이틀간의 중국 방문은 그에게 매우 수모스런 여행이 될 뻔했다. 미국과 중국이 최악의 관계인 상황에서 중국에게 북한과의 대화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하러 가는 처지였던 것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우리를 찾는다”라는 볼멘 소리와 함께 중국 외교부는 3월17일 알래스카 회담의 복수혈전을 벼르는 듯 했다.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중국에게 굳이 북한과의 관계를 부탁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7월22일 청와대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문 대통령이 남북이 통신선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이다. 원래는 면담 계획이 없었는데 대통령이 직접 그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은 미국의 본격적인 파트너이자 진정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직업외교관 특유의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이지만 그 순간 만큼은 중국과의 일전을 앞두고 특별한 선물을 받은데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7월26일 천진에서 열린 미중 회담은 중국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중국에 더 이상 부탁할 게 없어진 웬디 셔먼 부장관이 알래스카에서 블링컨 장관이 했던 것 보다 더 강경하게 중국을 몰아부쳤다고 한다. 북한이 중국에 통신선을 복원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은 발표 하루 전인 7월26일 웬디 셔먼이 돌아간 뒤였다. 따라서 중국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셈이다.
7월27일의 남북 연락통신선 복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가 친서를 통해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김 총비서로는 8월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식량난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데 정작 돕겠다던 중국은 미적대기만 하자 더 이상 중국만 바라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중국이 바빠졌다. 남북통신선이 복원된 7월27일부터 7월31일 사이에 중국산 식량과 정제유가 평양 시내에 쫙 깔렸다고 한다. 중국이 5월 말부터 주겠다던 식량 10만톤이 이때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8월1일 1차 김여정 담화가 나왔다. 통신선 연결은 끊어졌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한 것일 뿐, 남북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편으론 8월의 한미훈련이 재개 되는지 지켜보겠다며 한발을 걸치기도 했다.
남북 통신연락선 연결은 김정은의 ‘플랜B’
이어서 8월6일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서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촉구했다. 거의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합동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 중국 외교부장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왕이의 무리한 발언은 사실 북한을 겨냥한 것이다. 7월 말 중국의 쌀을 받았으면 밥 값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미연합훈련 시작일인 8월10일 두번째 김여정 담화가 나왔다. 한미연합훈련을 거론하며 "미국이야말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장본인”이라며 “조선번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해야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들은 북한이 주한 미군 주둔을 용인할 것처럼 하더니 본색을 드러냈다며 흥분했지만 맥락을 따져보면 중국의 밥값 요구에 대해 립서비스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밥값으로 폭탄을 요구했는데 폭탄 대신 말폭탄으로 갈음한 형국이다.
말 폭탄도 폭탄인만큼 남북 통신선으로 겨우 이어놓은 남북 채널이 또다시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성김 미 국무부 대북 정책 특별대표와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북핵수석대표 겸 외무차관이다. 두 사람은 주말인 8월21일 인천 공항을 통해 입국해 월요일인 8월23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미 북핵 대표회담 결과는 자세하게 알려진 반면 그날 오후 있었다는 성김대표와 모르굴로프 대표간 회담에 대해서는 일체 알려진 사실이 없다. 공식적으로는 한번 만난 것으로 돼 있지만 소식통에 의하면 한번 더 만나기로 돼있다는 얘기도 있다. 즉 미국이 북한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한미 채널과 미러 채널을 동원했는데 한미 채널을 통해서는 공개적인 메시지 발신에 주력하고 미러 채널을 통해서는 비공개적인 대북 직접 설득에 주력하겠다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공개 메시지의 효과를 증폭하기 위해 미 국무부가 한미 북핵대표회담이 있은 8월23일 월요일에 맞춰 ‘미국과 북한 관계 성명’이라는 이례적인 문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 관계를 5가지 주제로 나눴는데 첫번째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 규정하고 두번째 항목에서 미국의 대북 원조에 대해 ‘과거 북한이 기근과 자연재해를 겪을 때 북의 요청에 따라 식량과 긴급 지원을 제공했다’는 것을 환기시킨 점이 인상적이었다. 대북 지원은 성김 대표의 최근 두차례 방한과도 연결이 되는 대목이다.
바로 대북 인도지원에 대한 바이든 정부의 관심과 의지다. 사실 북한에 대한 인도지원에 대해서는 지난 5월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합의한 바 있다. 그 뒤 6월21일 서울을 방문한 성김 대표가 국내의 대북 인도지원 단체 대표들을 만났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번에도 8월23일 노규덕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의 회담 내용을 보면 “한미 양측이 보건과 감염병 방역, 식수 위생 등 분야에서 북한과의 인도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고 돼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인도 지원에 대해 진심인 것은 그것 외에는 마땅히 북한을 끌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대북 제재를 일부 완화하는 등의 선제적 조치를 안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바이든 정부 대북정책이 사실상의 ‘전략적 인내정책’이라 비판하기도 하나, 미 의회의 견제라는 현실적 제약을 과소평가한 얘기인 것 같다. 8월 초 미 의회조사국(CRS)이 발간한 대북 외교현황 보고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점진적 비핵화에 상응해 부분적 제재완화를 추진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관련 법안에 담긴 제한을 감안할 때 의회의 지지 없이는 점진적 제재완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회의 지지 없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제재완화를 강행하려 할 경우 저항에 부딪힐 것이란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도적 지원조차 마음놓고 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한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미국이 뒷받침해주는 게 최대치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2018년 모델이다. 먼저 남북채널이 열리고 대북 인도지원 문제가 떠오르면 미국이 자연스럽게 참여해 북미채널을 열어가는 방식이다. 남북간 인도지원 문제가 떠오르면 한미간 북미간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게 된다. 이때 미국도 뉴욕채널과 북경채널을 가동하게 된다.
김정은 총비서가 7월27일 통신선을 복원하는‘플랜B’를 시작했을 때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했을 것이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북한의 시야에는 오직 중국 뿐이었다. 한미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약속했던 지원은 안하고 무리한 요구만 계속하자 중국과의 관계는 김여정 선에서 대응(플랜A)하면서 본인은 보다 큰 그림에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가 등장했다는 것은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다. 김여정의 두번째 담화로 인해 한미훈련 끝나고도 남북채널을 다시 가동하기가 자체의 동력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멀리 있는 러시아가 촉매제 역할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관측통들에 따르면 미러 북핵 대표회담 끝나고 모르굴로프 차관이 돌아가면 러시아가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국이 러시아에 기대하는 비공식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한미는 공개 메시지로 북을 설득하고 러시아는 직접 면대면으로 김 총비서를 설득하는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 카드를 쓴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번째는 지난 5월19일 블링컨 국무장관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을 만나 6월16일 미러 정상회담까지 북미대화에 대한 김총비서의 전향적 반응을 이끌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당시 라브로프 장관이 직접 외교채널을 동원해 북한을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에 대해 미러 정상회담 다음날인 6월17일 김정은 총비서가 직접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라며 처음으로 대화 가능성을 열어놨다. 즉 러시아가 움직이면 북한이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두번째에 해당하는 이번의 러시아 카드는 웬디 셔먼 부장관이 중국을 통해 북한을 끌어내려던 노력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본격 가동됐다고 한다. 미국의 요청에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직접 라브로프 대통령에게 협조할 것을 지시했고 이번에도 라브로프 장관이 모르굴로프 차관에게 방한을 지시하는 등 직접 움직였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듯 다른 아프간 접근법
미군의 아프간 철군과 탈레반의 카불 재집권 등 급변하는 아프간·중앙아시아 사태에 대해 러시아는 겉보기에는 중국과 보조를 맞추는 듯이 보인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테러방지를 위한 중러 합동군사훈련을 벌이고 서방 외교관들이 다 떠난 카불 외교가를 중국 대사관과 함께 러시아 대사관이 남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 문제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보조를 맞출 생각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7월28일 왕이 외교부장이 천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만날 때만 해도 탈레반의 집권이 신장위구르 지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주로 관심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왕부장이 직접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을 거명하며 탈레반이 ETIM 등 모든 테러단체와 선을 긋기를 요구했다. 아프간 재건을 위해 중국의 경제 지원이 필요한 바라다르는 “어떤 세력도 아프간의 영토를 이용해 중국에 해를 끼치는 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극히 외교적인 수사로 몸을 낮췄다. 실제로는 ETIM 등 이슬람 과격단체들의 상당수가 파키스탄 북서부 산악에 근거지를 두고 아프간 영토를 이용하지 않고도 중국에 위해를 가할 수 있기에 하나마나한 소리였다. 중국도 그것을 모를 리 없지만 뭐에 씌웠는지 점차 아프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프간의 재건과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1조달러 어치에 이른다는 아프간의 막대한 광물 자원에 대한 욕심과 시진핑의 숙원사업인 일대일로 사업 등을 앞세우며 점점 빠져들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아프간에 발을 담글 생각이 전혀없다. 1980년대 10년간의 혹독한 경험을 통해 아프간에 대한 안좋은 추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보는 아프간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탈레반이 집권해도 내전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탈레반 내부에도 분파가 심해 자기들끼리 다툼도 심하다. 무엇보다 탈레반은 남부의 파슈툰 족(1460만)을 대표할 뿐 북서부의 타지크족(860만) 우즈벡족(280만) 서부의 아이마크족(260만) 등 다른 종족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족간 갈등이 그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이 아프간에 개입할 경우 매우 힘들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대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관심이 높다. 2014년 크림반도 진출로 인한 미국과 서방의 경제 제재로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2016년의 미국 대선개입 의혹과 시리아 사태 개입 등으로 트럼프 정부 때 이미 미 의회에 여러 건의 대러 제재 법안이 발의돼 있다. 공화당 소속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과 민주당 소속 봅 메넨데스 상원의 원등이 발의한 법안은 심지어 ‘지옥의 제재’ 법안이라고 불리우는데 러시아 국채거래 금지, 미국내 러시아 국영은행활동 금지, 테러지원국 명단 포함, 대러 투자금지, 푸틴 대통령과 측근들에 대한 개인 제재 등 역대 최고수준의 제재조치를 담고 있다. 그대로 실행된다면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직면한다.
트럼프 정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는데 바이든 정부에서는 다를 것이라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 역시 북한 이란 아프간 등의 지정학적인 현안에서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들 법안을 붙들고 있들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대신 대북 제재 법안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강경한 의회의 압력을 버텨내야 한다. 그러려면 러시아도 바이든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 바이든 정부 역시 미러관계에 이란과 북한 문제가 다 맞물려 있어 서로 동병상련의 심정인 것이다.
미군이 철수한 직후 아프간 정부군의 극적인 붕괴를 지켜보면서도 미군 철수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프간 전쟁은 9.11테러를 응징하고 미국에 대한 테러위협을 제거하는 데서 끝냈어야지 국가 재건까지 미국이 감당하려 한 것은 잘못이라는 상원의원 시절부터의 오랜 신념을 꺾지 않고 있다. 국가 재건까지 감당할 수는 없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신념은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아프간에 대한 인식과도 통한다. 즉 “미국이 뭘 하든 아프간은 또다시 내전에 돌입할 것이 분명하고 미국은 절대로 이 내전을 막을 수도 없기 때문에 다시 끌려 들어가면 안된다”라고 블링컨 국무장관과 설리반 안보 보좌관에게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전략 변화, 지역분쟁에서 중·러 겨냥 ‘대전략’으로
따라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아프간 철군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서두르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바로 미국의 대전략 변화이다. 1990년 냉전 종식 이래 미국은 중동과 동아시아라는 2개의 지역 분쟁에 비중을 두는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라는 강대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러시아와는 협력관계가 가능하지만 중국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중국과의 초경쟁(hyper-competition)이라는 강대국 경쟁에 초점을 둔 대전략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게 됐다.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전략문서에서 주된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2개의 지역 분쟁 대비 전략에서 중국과의 초경쟁 대비 전략으로 전환은 당연히 전세계 미군 배치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지난 2월4일 바이든 대통령이 미 국무성에서 연설을 하며 국방부에게 ‘전 세계 미군 배치태세 재검토(Global Posture Review)’를 주문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곧 아프간과 중동에서 미군을 철수해 동아시아 또는 인도-태평양 전구로 미군을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미군 철수는 미국의 대전략 변화에 따른 ‘미군 배치 태세 재검토(GPR)’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미 결론이 다 나온 것 같은데 뭘 더 검토한다는 것인가. 미 국방부는 GPR 결과를 올해 중반까지 발표한다고 했는데 아직 결과가 나온 것 같지는 않다. 흘러 나오는 얘기들을 보면 진통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미군 재배치 검토는 트럼프 정부에서도 계속 해오던 일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논의의 초점은 중동이나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동아시아나 인도 태평양으로 집결시킨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건 이미 결론이 난 것이고 동아시아에 붙박이처럼 전진배치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중국을 겨냥해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7월17일 미국 육군대학원 산하 전략연구원(SSI)이 발표한 `‘군의 변신: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초경쟁과 미 육군 전역 설계’라는 보고서는 결론을 딱 부러지게 내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게 한다.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전역에 대해 ‘중국과의 초경쟁(hyper-competition)을 펼치는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전역’이라며, ‘중국은 유사시 미군을 패퇴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군 현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현재 미군의 전진배치 태세를 보면 주로 ‘일본과 한국에 집중’돼 있는데 이는 ‘한국전과 냉전의 유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중국과의 초경쟁 전략 또는 무력충돌을 염두에 둔 전략으로선 반드시 유용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전진배치 미군 전력이 중국의 미사일과 잠수함과 유인-무인 공중체계의 표적 내에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첫째로 ‘향후 역내 배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장소에 분산배치’함으로써 ‘선제공격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재생성, 특정 시간과 장소에 가장 적절히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기민성, 한 곳의 전력이 완벽히 소멸하더라도 보충할 수 있는 잉여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북한은 계속 핵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와 운반체계의 실전배치를 지속하겠지만 재래식 전력은 오히려 위축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한국군이 전시작전권 인수와 군 현대화를 통해 보다 큰 책임을 맡는 것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즉 주한미군이 현재처럼 붙박이로 한국에 주둔하는 것보다는 ‘대중국 전략에 대해 공동의 위협인식을 공유하면서 당장 전략의 통합이 가능한 나라 호주, 일본, 타이완 3개 나라’로 분산하거나 최소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네이선 프레이어 미 육군대학원 교수는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한 VOA 측에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옹호하는 건 아니”라면서도, “한정된 예산과 자원을 고려할 때 중국의 위협에 초점을 둔 전력 운용의 최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이든 정부가 북한에 진심인 이유
그런데 올해 들어와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주한미군의 분산 배치와 통합적 운용 그리고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얘기는 원론적으로 공유하면서도 지금이 그 시기인가에 대해서는 신중해졌다. 당연한 게 지난해까지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우호적인 관계로 한반도 긴장 상황이 많이 누그러졌기 때문에 주한미군을 그대로 두기 보다는 중국을 견제하는데 효과적인 곳으로 분산배치하거나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주장을 할 수 있었지만 바이든 정부 들어 북한이 어디로 돌출할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위협을 강화하고 있다”며 “긴급히 대처해야 할 사안”이라는 목소리도 다시 등장했고, 미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국에 초점을 둔 국방전략이 주한미군 배치와 역할에 어떤 영향을 줄지 현 시점에서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라는 식의 원점회귀적인 얘기들이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미군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나 분산배치 등을 검토하는 기준은 소위 보수매체나 이곳에 단골로 출현하는 보수 전문가들이 주장하듯 한국 정부가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는지 안하는지와 관계없다. 아프간에서 보듯 미국은 오히려 그런 단세포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한미군의 유연성과 분산 배치 기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한반도에 대한 북한의 위협 여부라 할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미관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해 대선까지만 해도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진심인 이유가 분명해진다. 말 그대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켜 주한 미군을 중국과의 초경쟁하는 대전략의 현장으로 분산배치하거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유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분란을 조성케 하는 데 매달리는지도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야 주한미군을 앞으로 대만이나 호주에서 맞닥뜨리지 않고 한반도에 묶어 놓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