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원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 3부

by 김욱래

시간은 도망치듯 갔다. 3주 차 교육엔 ‘은거 생존’이 있었다. 대위가 교관이었고 무슨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다 앳된 일병이 조교라고 소개됐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일병은 조용하고 조곤조곤하게―그 일병은 여학생처럼 약간 수줍어도 하는 듯했다―비트*1를 파는 법이며, 파낸 흙을 처리하는 법, 불 만드는 법과, 먹을 수 있는 산야의 동식물들, 예를 들면 버섯이나 풀, 나무껍질에다 지렁이, 뱀, 쥐, 두더지, 다람쥐, 심지어는 박쥐나 날다람쥐를 포획해서 요리하는익히거나 여의치 않을 땐 회로-것 등 원시 인류에게는 필요했었을 법한 일상적인 기술들을 설명하고 몇 가지는 시연했다. 그런데 그 일병은 좀 우울해 보였다. 그 일병의 알 수 없는 신비감은 그날 밤 C.W 전건이 차려진 뒤 풀렸다.


404 정찰대대 창설 초기였다. 신병이었던 그에게 자주 애인의 편지가 왔다. 갓 병장을 단 소대원 하나가 특히 지랄맞았다. 그 병장이 그 편지들을 먼저 뜯어 읽었다. 여자의 언어들은 병장을 점점 매료시켰고 급기야 그 여자까지 갈구하게 되었다. 어떤 편지에 동봉된 여자의 최근 스냅사진을 입수하게 된 병장은 제 관물 캐비닛에 떡하니 그걸 붙였다. 원래 있던 최진실 사진을 떼고. 처음엔 좋았으나 자꾸 감질이 났다. 신병에게 병장은 이젠 대놓고 제 여자인 그녀의 새로운 콘셉트를 요구했다. 물론 신병은 많이 맞았지만, 엄청난 세월 앞에 묶인 처지였다. 병장은 속이 살짝 비치는 슬립의 여자 사진을 화장실로 가져갔다. 어느덧 그 정도 수위로는 무감각해졌다. 병장은 정액이 허옇게 말라붙은 그 사진을 원래 임자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목조목 일러주며 명심시켰다.

“알았지? 빨간색으로 그… 그거. 끈 빤스 말이야. 포즈 이… 이렇게, 알겠지? 최대한 야하게 찍으라고 해. 내 보겠어!”

신병은 거부했다. 며칠간을 이어서 맞던 깊은 밤이었다. 그는 그 병장의 캐비닛 서랍에서 커터 칼을 조용히 빼냈다. 세상모르고 자던 병장의 목동맥을 그 칼로 그으려다 신병은 결국 고개를 떨궜다.

담장을 넘은 신병은 산을 기어 올라갔다. 불침번은 화장실을 보낸 신병이 돌아올 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험악한 동부전선의 막막한 산줄기를 며칠간 헤맸지만, 신병은 인가를 찾지 못했다. 뭉친 눈을 씹었고 커터 칼로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얼어붙은 계곡의 돌무더기 밑에 동면 중인 개구리와 두꺼비의 배를 갈랐다. 눈 더미를 파낸 다음 낙엽 썩은 구덩이에서 다시 눈을 덮고 잤다. 놀랍게도 그는, 어느 날은 먹이를 찾아 나온 그 재빠른 청설모까지 잡아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당사자는 나중에야 그걸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머리까지 얼은 듯 3일 정도 후부터 날짜를 세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404 정찰대대 취사병이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있는 탈영병을 발견하였다. 귀대병의 첫마디는 이랬다.

“밥 남은 거 좀 주십시오.”


처음 신병의 탈영이 보고되었을 때, 전에 첩보대*1에 있었던 대대장의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걔가 갈 데가 어딨어. 이런 데서 벗어날 수 있으면 걔가 진짜 요원이야!”

원인 제공자에 대해선 이렇게 처분했다.

“영창 보냇! 그 변태 새끼.”

험준한 산줄기 아래 요소요소에 버텨선 헌병검문소와 군부대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군단에 탈영 보고를 하지 않았던 대대장이 산짐승 같은 몰골의 신병에게 물었다.

“얼마나 수고가 많았나? 이 자식 진짜 대단한데? 그래, 겨울 산에 먹을 게 많지?”

그리고 주임상사에게 말했다.

“얘, 일주일 위로 휴가 보내요. 집에 가서 영양 보충하고 애인도 좀 만나게.”

대대장은 다시 산짐승을 보았다.

“쉬고 와서 조교 해라. 네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돼. 정찰대원이라면 너 정돈 돼야 해. ……근데 또 도망가는 거 아니지?”

그 신병은 5일 만에 귀대했다.


암만해도 예비사단이 좀 더 나은 듯했다. 4사단 몇의 평가 결과는 수위 안에 들었는데, C.W계에서 이권휘에게 도전할 이는 없었다. 신들린 듯 전건을 때리고 받는 속도는 그냥 베테랑 간첩 수준이었다. 이권휘는 C.W를 특히 중시하는 부산 사나이의 총애를 받았다. 야간 침투는 손정원이 조장을 맡은 조가 유일하게 성공했다. 나머지는 다 잡혔고, 실전처럼 고문받지는 않았지만, 밧줄에 몽땅 거꾸로 매달렸다. 그들에게 그도 질 수는 없었다. 그의 분야는 특공 장애물이었다. 부산 사나이가 시범을 한번 보이면 그는 단박에 해치워버리고 바로 열외 되어 무료하게 놀았다.

군대에서는 안마사의 시합 형(形) 발차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간혹 있던 태권도 시간, 부산 사나이는 그 국가대표상비군을 멋쩍게 다시 들여보내고 그를 불러내 조교를 시켰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는 부대 복귀 문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조교들은 오히려 곧 돌아갈 사단 인원들에게 더 신경 쓰는 것 같았고, 한 가지라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 성의를 냈다. 그게 더 빠릿빠릿한 인원들에 대한 그들의 애정인 듯했다. 부산 사나이의 내무반은 그간의 그의 열정에 보답했다. 그 내무반이 종합측정평가에서 일등을 하는 바람에 이제 부산 사나이는 고향 바닷바람을 좀 쐬고 올 수 있게 될 터였다.

무성 무기는 실기 평가가 없었지만, 교육은 진행되었다. 그중 투검(投劍)은 읍내 철공소에서 직업 하사 반장들이 대충 깎은 것이었는데, 무게중심이 맞지 않는 그 투박한 칼은 6미터 거리 나무판에서 튕겨 날 뿐 웬만해선 꽂히지를 않았다. 교관과 조교들은 칼날 쪽을 잡는 ‘반 바퀴 던지기’로 시범 보였고 그렇게 지도했다. 비록 부엌칼 같은 생김새였지만 그들은 일부러라도 만들어 훈련하고 있던 것이었다. 칼이나 표창 던지기는 야간 은밀 침투 중 적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 소리 없이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걸 그가 한 번은 성공해 보고 싶었다.

“손잡이 잡고 던져도 됩니까?”

“그럼 더 힘든데……? ……뭐, 하고 싶으면 해 봐.”

교관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는 어떤 감이 왔다. 그의 체중이 실린 ‘무회전 직선 던지기’로 곧장 날아간 칼은 표적에 박히며 부르르 울었다.




*1 땅속에 구축하는 은거용 아지트.

*2 육군첩보부대의 줄임말. 육군첩보부대는 무장 공작원을 훈련하고 북파를 담당하였던 부대를 말하며 HID라고도 한다. HID는 파견정보사령부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의 약자다.




설날(2.17)은 연재 쉽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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