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감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3부

by 김욱래

모든 것은 그 끝이 있다. 청년에겐 아직은 유구해 보이는 인생도 언젠가는 종국을 맞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다시 자대로 돌아간 후의 그 끝이 예감되지 않았다.

산중은 그다지 덥지 않았고, 처음엔 여유 있어 보였던 3주도 거의 다 지나갔다. 그동안 손정원의 낯빛엔 화색이 돌았고, 눈동자는 영특한 학생처럼 초롱초롱했다. 이권휘는 아예 느긋해져 있었다. 학창 시절 그들은 공부를 꽤 했을 타입이었다. 제법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되찾은 4사단 인원들은 이제 저희가 군인인지 무슨 학생인지 헷갈리는 듯 보였다. 지나온 인생에서 학생이었던 기간이 훨씬 길었을 터였다.

정보 주특기 교육은 그들에게 어떤 복무 의지, 또 임무에 대한 책임 의식을 부여했고, 고되고 빡빡한 일정이었을망정 정찰병으로서의 뭔가 충일(充溢)한 감정이 들게 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이렇게 그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군가 〈팔도사나이〉 단지 첫 구절에만은 어느 정도 동의하고 싶은 기분이 들도록 했다.


분주했던 순간순간들은 홱홱 지나갔고 이젠 복귀해야 했다. 돌아가면 부대껴야 할 이들을 생각하니 그는 아랫배가 쏴 하고 몸이 무거워졌다. 고도차에 이미 충분히 적응되었던 텐데도 연병장에서 약간만 움직여도 그는 숨쉬기가 벅차졌다. 날이 흐려졌고 물기를 머금은 바람은 세찼다. 산봉우리들을 누르고 있던 먹구름이 강풍에 떠밀려 동쪽으로 내달렸다. 날씨는 곧 폭풍이 몰려올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했다. 스산한 돌풍이 휘몰아치는 오후, 모든 평가를 끝낸 뒤라 시간이 넉넉해진 교육대는 음료수 한 박스를 걸고 내무반 대항 축구 시합을 벌인다고 했다. 그는 또 갑작스레 얼어붙었다.

106 보충대는 굉장히 편하다고 ‘파라다이스(Paradise)’라 불렸다. 그 낙원의 기간병들은 ‘인간병기(人間兵器)’ 장정 하나를 남기고 싶어 했다. 그 장정은 물론 ‘꿀을 빨’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을 그 낙원에 데리고 있으려고 중령이 이렇게 물었을 땐 급작스레 적이 소침(消沈)해졌던 건 사실이었다.

“너, 축구도 잘하지?”

그건 잘 못한다고 그가 대답했다. 안색을 싹 바꾼 106보충대는 이제 그가 필요 없었다. 그다음부터 축구 젬병의 원죄(原罪)는 계속 그의 등짝에 달라붙었다. 공을 못 다룬다는 건 엄청난 흠결이며 범죄였다. 남자는 무조건 축구라면 광분해야 함이 마땅했다.

그는 남들 사이에 섞여 자신이 그냥저냥 뛰어다니는 시늉만 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공만 오지 않는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는 그곳에서 이제껏 얼마큼 다시 간신히 채워진 알량한 자존심은 지켜내고 싶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후들대는데 흙먼지가 회오리치는 거센 바람 속에서 공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하는 그의 숨통은 콱콱 막혔고 굼뜬 몸뚱이는 천근이나 되는 듯했다. 그는 버벅대는 자신의 몸뚱이가 자욱한 흙먼지로 숨겨져 가려져 언뜻 분간되지 않기만을 요행(僥倖)했다.


부산 사나이는 4사단 그 이등병의 의외의 몸동작을 보았다. 공 앞에서 이등병은 거의 얼어붙고 있었다. 엉성하게 가끔 미적댈 뿐 공가는 방향과는 전혀 따로 움직였다. 그동안은 굉장한 이등병이었고 타 부대 인원이지만 탐나는 병사였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그 이등병은 안간힘을 써보는 것 같았지만 안 그러는 게 더 나을 성싶었다. 계속해서 무의미한 헛발질만 해댔다.

“야, 인마. 너 왜 그래?”

그렇게 소리를 빽 질렀지만 부산 사나이는 곧 후회했다. 자신을 돌아다보는 이등병은 절망적이다 못해 죽을상이 되어있었다. 우선은 후임의 내무반을 누르는 게 급했기에 그다음부터는 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랬던 그 이등병의 편지는 심각한 것이었다.


퇴소 전날, 내무반장들이 편지지와 봉투를 돌렸다. 점심 식사 집합 직전 부산 사나이가 그를 따로 불렀다. 편지를 검열한 게 분명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는 그 부대 분위기와 내무반장을 신뢰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부산 사나이는 그를 빈 간부 전술 연구실로 데려갔다.

“너… 편지 말이야.”

나무 테이블 건너에 앉은 부산 사나이의 시선엔 진정성 있는 우려가 담겨있었다. 억양은 좀 있지만 내무반장은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그러기까지 굉장한 노력을 했을 터였다. 내무반장이 후,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예…, 죄송합니다.”

그는 그 말년 내무반장에게 솔직하여지기로 했다.

“가족들에겐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내무반장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 그의 불까지 붙여주었다.

“넌 너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는 거 같아. 다른 사람, 그러니까 나한테 좀 얘기해 봐. 도울 수 있는 문젠지도 모르잖아?”

말년 병장의 말은 옳았다. 여태껏 그는 쭉 그래왔던 게 맞았다. 그러나 그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 문제는 내무반장과 관계없는 것이었으니까.

“편진 나만 봤어. 나우권. 더 잘 생각해 봐라.”

“많이 생각했습니다.”하면서 그는 연기를 아래쪽으로 흘렸다.

“…부모님 생각해야지. 너 정말…? …힘들어도 시간은 가. 나 봐. 벌써 말년이잖아?”

내무반장은 마치 동생을 타이르는 친형처럼 굴었다. 그는 처음엔 내무반장에게 화가 났고, 다른 한편으론 미안했지만, 결심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는 모친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화는 진전되지 않았다. 결국 그가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면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무반장의 성의 때문에, 그리고 도울 수도 있다기에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는 머리를 짜냈다. 자신은 그 가련한 은거 생존 조교처럼 하릴없이 산악을 헤매기도 싫었고, 그 부대 인원들에게도 굉장히 민폐를 주는 일이었다.

잠시 정리해 본 부산 사나이는 그가 그걸 감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가능한 것이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이었지만 일단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바빴다.

“내무반장님. 어머니께 전화 한 통 하고 싶습니다.”

“그래. 건강히 잘 있다고 그러고 걱정하시지 말라고 그래. 나 따라 와.”

부산 사나이가 대대 행정반 복도 벽에 붙은 장거리 전화박스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부산 사나이는 집요하게 그의 곁에 붙어있었다. 그는 시골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몇 가지를 부탁했는데 모친은 바쁜 일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더 바쁜 건 그였다. 나중에야 그녀는 할 수 없이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 저녁이었다. 다른 내무반은 어쩌는지 그는 몰랐지만 부산사나이의 내무반은 취사장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대신 내무반으로 커다란 알루미늄 들통과 식판들이 들어왔다. 부산 사나이의 재량으로 취사반에 한가득 끓여 오게 한 라면이었다. 무럭무럭 김이 나는 라면이 식판에 담뿍 씩 담겼다. 간덩이가 조막만큼씩 해 그의 자대에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진짜 라면을 그 부대에서는 들통째로 끓여 와 내무반 침상에서 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자 쪼가리를 늘어놓고 전역 회식이랍시고 가년을 떨던 인원들이 떠올랐다.

물론 404 간부들도 허락 없이 그러는 건 통제할 터였다. 그러나 겨우 라면이나 끓여 먹는 궁상들 속에서도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그 부대의 분위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것은 단지 내무반장 개인의 통 큰 결단이거나 어떤 잔정일 수도 있을 터였지만. 마지막 날이라고 태도가 풀린 입소병들의 간 큰 주문을 받고 선 부산 사나이가 제 옛사랑 얘기와 함께 노래 한 곡을 불렀다.

“오늘도 갈대밭에 저 홀로 우는 새는 내 마음을 알았나 봐. 쓸쓸한 바람에―

아득히 밀려오는 또렷한 그 소리는 잃어버린 그 옛날에 행복이 젖어있네.

외로움에 지쳐버린 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하나요.

난 몰라요. 이 가슴에 아직도 못다 한 사랑.”

물이 다 빠져서 흿누런,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줄이 잡혔던 낡디낡은 위장복의 404 정찰대대 말년 병장에겐 긴 세월의 훈련과 고통을 견뎌 낸 후에야 만들어지는 여유와 관록이, 군인다운 멋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진짜 군인만이 가능할 수 있는 고독한 아우라가 존재하고 있었다.

화요일 연재
이전 15화상 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