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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Jul 27. 2024

3장

김욱래 중편소설 연재

  얼마 전부터는 그는 더러워서 대리점 옆 대문 안으로 자전거를 넣지 않았다. 큰아이가 타던 거의 썩은 자전거였는데 부장이라는 친구가 넣어두라고 해서 말을 들었었다. 2층이 주인네들 살림집이었다. 들락거리는데 걸리적거린다고 인상을 쓰는 여자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후론 그는 그 ‘하찮은’ 자전거를 옆 건물 주차장 담벼락에 붙여 세웠다. 

  “기사님은 오후엔 뭐 하세요?

  자전거 앞 대가리를 돌려서 그가 막 올라타려는데 어디로 점심을 하러 가려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작년에 갓 마흔이라고 했던 그 부장이 물었다. 그 친구도 물론 그가 저녁에 다시 자기 일을 하러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낮잠 자요.

  그래도 그는 낮잠, 그러니까 ‘시에스타(siesta)’를 취할 수 있는 생활이 나았다. 한 전쟁을 다룬 두 이야기가 기억 속에서 뒤섞였지만, 아마도 피우다 만 담배꽁초―그걸 귀에 꽂은 채 죽은 병사의―가 나오는 스토리에서는 아니고 다른 이야기에서였을 것이다. 거기에 시에스타가 나왔었다. 그게 꼭 요긴했다. 그래야 저녁 출근 전까지 좀 기운을 추린 머리로 뭔가 생각을 매겨 볼 수가 있었다. 그 시간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어 이탈리아에서는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반 정도까지이고 그리스에서는 두 시에서 네 시까지, 제일 긴 스페인은 세 시간이라고 했다. 시에스타에 들어가면 상점가는 물론 관공서까지 문을 닫는다. 나중에 그걸 과학적으로 연구해보니 생물학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이 나라엔 그런 개념 없다. 점심시간은 달랑 한 시간이다. 아직도 그런지 몰라도 자신 고교생 시절 점심시간은 30분이었다. 스물 후반 몇 달 일해야 했던 회사 역시. 그러고는 비몽사몽 상태에서 무조건 일하고 무조건 수업해야 한다. 비능률적이라고 해도 이 나라에선 죽자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는 밤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돌아오면 동동주를 몇 주발 마시고 또 몸을 뉘어야 했다. 집 바로 근처 슈퍼에서 눈에 띄었다. 예전 한순간은 C 시의 최초이자 유일한 ‘마트’ 급이라 지하서부터 3층까지 상품과 문화의 ‘소비자’들로 복작거렸었다. 대형 마트가 두 개나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최초 주인은 물주들의 돈을 몽땅 챙겨 들고 미국으로 야반도주해버렸다. 남들 하는 얘기로는 거기서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한다. 

  다른 것들이야 그렇다 쳐도 동동주는 ‘순 한국적’인 것 몇 가지 안에 들 거라고 그는 점수를 주었다. 1.7L짜리 비닐 병 하나에 1,900원. 처음 그걸 보고서 시내에서 예전엔 찾기 쉽던 학사주점의 풍경들이 그는 떠올랐다. 한 병씩 사 들고 들어와서 다시 그가 동동주를 마시게끔 된 것이 꽤 되었다. 아내는 그 술을 싫어했다. 그는 노란 양은 주전자—이것도 그 슈퍼에서 사 왔는데 때리거나 해서 일부러 찌그러뜨리지는 않았다—에 그 허연 술을 따라 혼자 마셨다. 물론 찹쌀로 제대로 만들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그 제품은 막걸리와는 다르게 다음 날 아침에 몸이 붓지를 않았다. 

  아무튼, 그 대답을 들은 부장의 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영 몸 컨디션이 좋지가 않아서 일 나가고 싶지가 않고, 나가도 왠지 시간이 안 가는 날이 있다. 전날은 끈적거리며 더웠는데 일을 가려고 나서보니 비가 오고 있는 참이었다. 자전거를 못 끌고 우산 쓰고 걸어가야 했지만 문득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앞 유리에 부딪는 빗물. U 시 쪽으로 미끄러지는 자동차 전용 도로변 어두컴컴한 산들. 

  외롭다……. 그는 그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기사들이 이래서 자꾸 그만두는 모양이다……. 점주야 원래 입장이 있다 쳐도 그 여자도 역시 일조를 할 터였다. 며칠 전에 그 여자가 말했다. 

  “이젠 기사님이 덜 빡빡할 거예요.”

  하기야 외로운 일이었다. 고독하다는 기분이 가끔씩 들었다. 이제는 그도 그리 느끼는 일이었다. 

  이렇게 어둑하게 젖는 날 운전대를 잡으면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아……, 그 노래! 처음엔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한 친구가 선물한 파트리샤 카스(Patricia Kaas)의 테이프에 담겨있던 그 노래. 옛날 그 숨 막혔던 사랑이 가고 자신은 그 노래를 틀고 아이들 태우는 비참한 승합차를 혼자 끌고서 어디를 얼마를 헤매어 다녔던가. 이 같은 빗속의 침침한 날에는 그런 노래가 제격이었다. 입술을 움직여 그는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Madrugada me ve corriendo

  Bajo cielo que empieza color

  No me salgas sol a nombrar me

  A la fuerza de "la migracion"……”

  그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산줄기들은 좌우로 아련하고 잔잔하게 지나갔다. 다음부터는 입속으로만 음 음 거렸다.

  ‘Donde voy, Donde voy

  Esperanza es mi destinacion

  Solo estoy, solo estoy

  Por el monte profugo me voy’

  새벽녘, 날이 밝아오자 난 달리고 있죠. 태양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에서. 태양이여, 내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 주세요.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 희망을 찾는 것이 내 바람이에요. 난 혼자가 되어버린 거죠. 혼자가 되었어요. 사막을 떠도는 도망자처럼 난 가고 있어요…….

  오늘 밤엔 소주를 한 병 따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같이 할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차를 몰고 길을 나서면 앞차의 방둥이를 볼 수밖에 없다. 그게 그것 같지만 새 모델들이라 한다. 왜 저따위로 만드는 걸까. 세계에도 좀 팔린다고 하지만 하나같이 못생긴 것이다. 

  “병신같은 디자인하고는…….”

  그는 그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차라리 각이 있는 옛날 차 중에 더 괜찮은 것들이 있었다. 여자들 취향에 맞추려고 그러는 것 같지도 않고, 점잖지도 못한 것이다. 이 나라 차들 껍데기만 맨날 바꾸지만 어디에 기발하고 참신한 부분이 있는가. 바퀴 네 개에 그저 뚜껑을 얹어 놓았을 뿐. 

  이하급은 모르겠지만 바네사 메이(Vanessa Mae)나 야키다(Yaki-Da)를 틀고 싶어도 중형 이상의 승용들은 테이프 구멍 자체가 없다. 아니, 저희 마음대로 함부로 문화를 바꾸어버리는가.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숱하게 차를 바꾼다. 길거리만 타도 온통 소비를 조장하고 있다. 

  언뜻 TV 화면을 봐도 마찬가지다. 뉴스들. 하루 이틀 얘긴가. 경제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 어쩌고. 소비심리 위축과 대책 어쩌고. 열심히 소비해야 경제가 성장 된다는 얘기인 듯했다. 그러나 대체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란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이 촌 도시 물가는 서울이나 진배없이 비싼데 특별히 맛있는 집도 없다. 좋다. 맛대가리 없어도 돈이 생기면 열심히 사 먹어 준다고 치자. 그러면 이 동네 경제가 좋아지는가. 혹여 나아진다 한들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정신없는 CF들 천지…….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모방 된다. 욕망은 원래 결핍감에서 발생 되어야 옳지만, 그 결핍감 자체를 사회가 대량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도 특히 이 동네에 소비 많이 하고 살았었다. 소비하느라 돈을 모으지 못해 이렇게 개고생해야 하는 것밖에는 남은 게 뭐가 있는가. 결과는 영락(零落)뿐이었다. 

  내 일을 보자. 긴 칼은 정신이 필요한데, 다 정신들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정신들은 없으면서 먹고 입고 놀고 쓸 것들만 다 먹고 입고 놀고 쓴다. 세상이 이런 것이다. 정신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은 이제는 더욱 필요 없어진 세상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영락한 것이다.

  그 매스 미디어라는 것. 겨울, 목욕탕에서였지? 한쪽 뉴스에서는 IS라는 무슨 이슬람 극단 무장단체가 요르단 전투기 조종사를 새장 같은 입방체의 철창에 가뒀다가 산 채로 불태우는데―그가 타 죽으면 묻어버리려고 불도저가 돌무더기를 준비한 채 뒤쪽에 대기하고 있었다―채널이 휙 바뀌더니 농구 경기장 치어걸의 튼실하고 육감적인 허벅지들을 클로즈업했다. 젊은 여자들의 희고 건강한, 벗은 허벅지들과 산 채로 화형당하는 군인. 

  그 요르단 군인이 화형당하고 있는 뉴스와 같은 시각에 또 다른 채널에선, 굳이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생김생김이 꼭 메뚜기 비슷한 이미지의 어느 전 개그맨이 진행하면서 낄낄거리는 무슨 ‘예능 프로’라는 것이 한참이었다. 아내는 좋다 하지만 그 메뚜기 일당은 하나같이 머저리 같은 것들이다. 대체 이런 짓거리들이 다 뭐란 말인가. 그때 자신은 모욕감이 치밀어 올랐었다.




  상상을 구현해 내는 것. 자신은 그게 먼저였다. 어떤 사람은 생각함으로써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돈도 들지 않는다. 그게 허다한 닭대가리들, 그런 문맹들과의 차이였다. 그가 말하는 문맹이란 글자를 모르는 게 아니라 문맥을 모르는 치들이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런 건지 그는 손톱 발톱 같은 것엔 영 신경을 쓰며 살지 않다가 너무 길어져 끝부분이 얼마쯤 부러져서 아프거나 하면 마지못해 잘랐다. 돈만 들지 머리 자르는 것도 귀찮았고 이를 꼼꼼히 닦는 것도 그랬다.

  자신이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는 기분만으로는 사실 별로 쓸데가 없다. 뭔가 거기에 따른 가시 되는 결정(結晶) 같은 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기분을 그저 유지하려고 허둥거리면서 쓸데없이 자기 몸만 고달프게 만드는 이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은 것이다. 

  사람은, 특히 나이가 들면 쓸데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야 쓸 데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창 안쪽이나 창밖에 조용히 앉아서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 그는 그런 시간이 소중했고 그런 시간을 갈구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거의 쉬는 날도 없다. 빨간 글씨, 어린이날도 일을 나갔고 석가탄신일도 나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선 그것, 상상을 구현해 낼 수 있는 그 작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위는 다 어렵고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종일 하는 직원이라고 했다. 자전거로 시간에 맞춰 대는데 190cm가 약간 모자라 뵈는 거구의 청년이 머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락에 떨어져 역시 팔려온 청춘.

  “나이가 어떻게 돼요?”

  부장이 일단 며칠은 그러래서 조수석에 새로 온 청년을 태우고 그가 물었다. 갓 서른이라고 했다. 시커먼 살갗에 배가 볼록했다. 여자 스타킹같이 짝 붙는 하얀 토시는 뭣 하러 팔뚝에다 끼고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체격 좋구먼. 말 놓을 게. 내가 아주 큰 형뻘은 되는데.”

  큰 형뻘뿐만 아니라 일찍이 일탈했었더라면 아버지뻘이라도 될 수 있을 연배였다. 

  “처음엔 골치 아프니까 오늘은 내가 하는 순서만 잘 봐둬. ……근데 앞으론 일해서 뱃살을 좀 빼야겠어?”

  뱃살 건은 좀 어렵겠다고 했다. 매일 밤 자기네 원룸에서 저녁밥과 같이 소주 한 병씩은 꼭 비우고 자야 한다는 거였다. 노래방을 하다 ‘말아먹은’ 다음엔 치킨집을 하다가 역시 ‘털어먹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닭치는 작업도 꽤 잘할 수 있을 듯했다.

  우람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청년은 상당히 공손했다. 첫 마트로 가는 길에 언제나처럼 등교를 하는 ‘님펫(nymphet)’―험버트 험버트의—들의 주름 스커트 자락이 나풀거렸다. 

  “아니, 냅둬. 오늘은 내가 하는 것만 봐.”

  차를 세우고 짐 카트를 끌고 오자마자 거구의 신입은 훌쩍 냉동 탑으로 올라갔다. 올라간들 제가 뭘 어찌 알까 보냐. 

  “뜨거운 몸짓으로 내 가슴에 불을 남기고 갈 테면 가봐라. 돌아서 가는 너를 붙잡진 않겠다…….

  신입에게 일을 보여주고 두 번째 마트로 가는 중에 그는 속에서 그 노래가 나왔다. 그는 재빠르게 손을 놀려 보여주다가 자기가 해놓았던 것들이 생각났다. 그중 두 개는 이미 시절에 풀려버린 노래처럼 새로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걸 해야 하건만, 그럴 수 있는 오전의 행복은 다시 와줄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의 그 작업에 대해서는 특히 이야기를 나눠볼 사람은 없었다. 이제 결국 그가 그걸 한다는 걸 알게끔 되었어도 주위는 무슨 감동 따위만 운운할 뿐 진짜 그것의 속성으로서의 ‘차가움’, 그러니까 ‘현실을 그리는 시선의 냉정함이라든가 무자비함’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연 무지했다. 진짜배기 그것의 의무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그네들은 영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산물이 어떤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깊이에 감동을 받느냐 하는 것은 그네들 수준의 문제였다. 진짜배기는 본래 진지하고 난해한 거였다. 그네들은 역시 ‘소비문화’로서의 대중적인 것, 혹은 키치(Kitsch)를 원했다.

  똑같은 물이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하는데,―원래 그는 이 같은 비유를 진부해 했다―적당량의 독은 외려 금방이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다.

  결국, 그네들은 마지막엔 그의 삶 자체에 대하여 이렇게 물었다.

  “그래, 집에선 아무 소리 안 해?” 

  듬직하니 신입은 꽤 열심이었다. 자기는 빚이 많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 마트에선 요새 어린 가수 애들의 노랫소리―영업 시작 뒤였다—에 언제나처럼 욕을 뱉고 싶다. 어쩌다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제대로 부르는 노래는 드물었다. 얄팍한, 너무 표피적이고 유아적인……. 걔들이 결코 실제로 경험치 못 해봤던 그것. 억지의 감정, 억지로 질러대는 소리. 그게 아니면 성량도 안 되는 것들이 귀여운 척을 하고 앉았는, 자장가하고 구별되지 않는 코맹맹이 소리. 얇디얇은 세상. 역정이 올라오는. 

     



  부장은 처음에 단지 사흘만 가르치라고 했다. 물건이 떨어지는 날엔 오후라도 신입이 가서 깔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는 음료도 사줘 가며 그간 터득 되었던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러나 속았던 것이다. 분주한 매뉴얼이긴 해도 외려 다른 눈치들 신경 쓸 필요 없는 두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 

  “기사님, 뭐 하세요? 저기 있잖아요. 고무장화로 얼른 갈아 신으세요. 앞치마 하시고.”

  부장은 매우 떳떳했다. 그는 스테인리스 작업대, 주인 내외 사이에 끼여 세워졌다. 짧은 칼질. 반쯤 해동된 시리고 미끄러운 브라질산 닭고기를 절단한다. 50kg쯤, 고기 첨을 쥔 왼손 손가락들이 선뜻선뜻해서 오므라든다. 이제 80kg 정도, 핏물이 얼굴에 많이 튄 것 같지만 고무장갑을 벗어 잠깐이라도 손을 놓기에는 꽤 눈치가 뵌다. 

  이건 영 그렇지 않나. 나는 운전기사로 들어 왔……? 다른 코스엔 부장이 나갔다. 지금 거의 110kg. 아, 다 썰면 까만 비닐봉지에 10kg씩 계량해서 쌓으랬지? 

  다음날, 그다음 날도 요행은 없었다. 김치 담그는 식당 아줌마처럼 저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시즈닝(seasoning)으로 버무려낸다. 시간은 가고 있는가. 그렇다. 오후에 낮잠을 잘 수 있다는 게 죄다. 눈치가 부장과 신입 사이는 그간 꽤 격이 없어진 듯했다. 그의 다행은 두 번째 타임의 외곽 코스는 하루걸러 한 번씩 용인되었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마주쳤는데 시내 마트를 돌고 막 들어오는 신입은 괜히 어깨를 두 번 추썩거리더니 그의 냉동 탑—이제 옆문이 없는 헌 트럭의—에다 작업이 된 장거리 궤짝들을 실어주는지 밖에서 텅텅댔다. 천성은 아주 나쁘지는 않은 친구인 듯했다. 굳이 그는 말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봤더니 자기 힘을 믿어서 그러는 건지 그 거구는 40kg이 넘는, 그러니까 작업을 해서 쌓아놓은 궤짝을 한꺼번에 두 짝씩을 나르는 거였다. 이젠 옆으로 가서 조용히 말려야 했다. 

  “허리 나가. 노가다는 그렇게 뛰는 게 아니야.”

  가까운 데 한두 군데 더 갔다 와야 할 것이 뻔해 5분쯤 늦게 들어오려 하다가 굳이 그렇게까지 머리 굴릴 필요 있나 해서 5분 일찍 들어왔더니 여자가 말했다.

  “열두 시 땡 치면 퇴근하려고 또 엄청 밟았겠어요?”

  사무실 저쪽 식탁에는 큼지막한 것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벽걸이 TV 화면엔 필리핀 어디라고 하는 정글의, 원시적이고 신비롭고 커다란 계곡 안 풍광이 펼쳐지고 있다. 옥 색깔 나는 열대 물빛. 반쯤 벗은, 시원하고 즐겁고 자유로운 한때를 보내는 원주민들. 

  “우리나라도 경치 멋있다고들 하는데 저거 봐, 기가 막히네. 설악산 뭔 계곡 같은 데는 갔다 대지도 못하겠네, 못하겠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TV를 올려다보고 있던 남자 주인이 동그란 눈을 껌벅껌벅하며 그의 동감을 구했다. 그는 빨갛게 단풍 진 설악산을 떠올렸다.

  “대단하네요, 사장님. 그래도 우린 사계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맞아!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지.”

  점주가 그리 인정하는 기회를 그가 잡았다. 

  “사장님, 저도 오늘 밥 좀 먹고 가도 됩니까?” 

  닭도리탕―닭볶음탕이란 새 이름은 왠지 덜 먹음직스럽게 들렸다—냄새가 기가 막혔다. 마트에서 빼 온 날짜 좋지 않은 것으로 올렸었을 거였다. 나가서 사 먹다가 직원이 한 명 늘었다고 이제 해 먹는 모양이었다. 집에 가서 혼자 밥을 차려 먹다가 울컥하곤 했다. 예전에 키웠던 사람들, 점심이며 회식이며 자신은 많이 먹였었다. 

  인생을 그려가게 되면서 사실 그의 행동은 많이 위축되었다. 일 나갈 때 말고는 그저 틀어박혀 있는 게 좋았다. 함부로 사람들을 만나는 등 행동을 주로 하다 보면 역시 예전처럼 허망해졌다. 삶은 또 그냥 가버리게 되는 것이다. 조용히 임하면서 게으름 없이 자신 속에서 인생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점주가 또 눈을 껌벅거렸다. 작년에는 먹고 가라고 가끔가다가 그랬었다. 

  “점심은 원래 준다고 안 했잖아? ……돈 내고 먹든지.” 

  점주가 슬슬 웃었다. 농담이래도 그는 그냥 휙 나와 버릴까 하다가 착착 달라붙는 냄새로 발을 묶였다.

  “사모님께서 여간 음식 솜씨가 좋으셔야지요.”

  “난 원래 잘해요.”

  여자가 그리 받았다. 

  한 끼를 얻어먹고 나오는 그 가게 앞길에 수레를 단 요구르트 스쿠터가 막 지나가는 참이었다. 둥글고 넓은 모자챙 그늘 속에 새댁 같은, 젊은 여자의 옆얼굴이 묻혀있었다. 베이지와 파스텔톤 분홍색 제복의 가냘픈 등. 아직 새파란 그 아낙은 열심히 사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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