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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Aug 03. 2024

4장

김욱래 중편소설 연재

  시내 배달을 나가서 신호 대기를 하던 중이었다. 여자가 조수석 차창 옆으로 지나갈 때 문득 햇볕이 세다는 것을 알았다. 혹, 늦지는 않았을까! 얼른 그는 모자에서 스포츠 고글―이 일을 하려고 만 원 주고 산 거였다—부터 벗겨서 꼈다. 

  여태도 키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자라목의 여자는 하늘색 여름 블레이저의 등짝을 보여주었다. 깜장 광이 나는 스키니 바지. 언뜻 알이 잔 진주 목걸이를 걸었던 듯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3년. 작아빠진 엉덩이였었는데 지금 보니 너도 나잇살이 좀 붙었구나. 옷은 여전하게 잘 차리고 있었다. 자신을 한때 이 촌 도시를 떠나도록 만들었던 냉랭한 동갑내기였다. 그는 떠난 뒤 한참 방황하다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제는 핏물을 튀기면서 닭을 썰며 트럭을 몬다.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한다는 조막만 한 아이에게 옛날 자신은 그 여자를 빼앗겼다. 자기도 어째 보지 못하고 지켜줬던 단발머리 숫처녀였다. 가방에서 단도가 나오자 나중의 그 쪼그마한 성형외과는 자신과 그 자라 모가지 앞에서 ‘목숨을 걸겠다!’고 했다. 자신은 결국 그 학생의 목숨을 취하지는 않았다.       

  들은 바로는 남편이 술집 계통이라고 했다. 거의 룸살롱 쪽이었을 거였다. 똥똥하고 난쟁이 똥자루만 한 키인데 양아치 스타일로 차린 그 남편이란 자를 그도 본 적이 있었다. 시내 옷가게 골목―그래도 제일 번화가였다―어느 닭갈비 집으로 아내와 같이 들어갔는데 그네들 내외와 어린애 하나가 한 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빈 데가 없어 바로 옆 상에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부러 도로 나오지는 않았다. 아이 아빠는 여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낮은데 더해 또, 대단한 추남이었다. 저 물건이 저런 타입을 좋아했던가, 그는 잠시 의아했지만,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양아치 타입의 낯바대기엔 돈은 꽤 붙어있어 보였다. 어디인들 다를까만 돈이 없었다면 역시 거기도 자신에게는 머나먼 거리였다. 

  그런데 볼 때마다 여전히 뭔가로 뚱하게 부은 듯한 얼굴. 탁한 안색. 여태껏 너는 뭐가 그리 불만인 것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순간, 자기는 한다고 해놓았지만, 그 같은 소재들로 인해 결국은 외려 대중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그는 낙담스러웠다.

  대리점에서 다시 물건을 싣고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철로 위로 놓인 둥그런 구름다리를 넘으면 한 번 멈춰가는 편의점이 있다. 비상 깜빡이를 넣어둔 트럭의 한쪽 바퀴들을 출입문 앞 인도 턱에다가 올려두고 얼른 차가운 캔 커피를 하나 사 들고 나와 다시 급히 올라탄다. 그 시간이 커피 타임이었다. 

  그렇더라도 오십 전까지만 그거라도 하나 더 마칠 수 있다면…….

  수 없는 밤을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었다. 무도 학과 실기시험 전날, 따라온 친구와 여관방에 마주 앉아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을 ‘쳤’었다. 관능에의 욕망. 여자들, 여자들! 애달픈 옛 C 시의 추억. 그러했던 젊은 날은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국에는 그런 쪽 사람이 되었다. 그 방면이 아니라면 아무 쪽에도 의미는 없음을 알고 늦게라도 다시 가게끔 되었던 거였다. 그런 걸 하며 살려고,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자신은 다시 사업장을 차렸다. 이제 모든 것들은 그 길에 선 사람으로써의 삶을 중심으로 해서 놓여야 했다. 그래서 닭고기 트럭을 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관과 고집이 센 사내였다.     

  정말 거기서 그것만, 백만 원만 나오면 되나? 그러면 살 수 있나? 그러면 맘 편히 할 수 있겠나……? 

  따개를 열고 두어 모금 물면서 긴 다리를 들어서려는데 컵꽂이에 세워둔 캔이 덜덜댔다. 직전에 깔린 과속방지 요철들을 또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캔에서 마구 튀어나온 커피 방울들이 벌써 여기저기 흩뿌려진 뒤였다.   

   



  지상에 나서 ‘매일을 일요일같이 즐겁게’ 지낼 수 있어야 하건만 새로운 하루하루는 선물이 아니었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지만 머릿속이 완전히 숙고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몸뚱어리가 선택을 내리고 재빠르게 움직여 자기가 이미 그 새로운 상황 속에 임해 있을 때, 즉 머리의 판단이 육신의 그것을 결국은 뒤쫓게 될 때, 그러한 특징적인 자신을 되풀이해 목격하게 될 때마다, 아연하면서도 어쩌면 그런 메커니즘이 생존에 있어 더 효율적이지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었다. 꾸물거리는 머리의 늑장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몸이 먼저 판단하고 결정해버렸던 삶의 선택들. 그런 야생성에 자신은 자부심을 가져왔었다. 긴급을 요하는 선택에 몸이 먼저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 그러나 이제 점점 그게 꼭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두어 시간 닭 작업을 하게 된 뒤로 어느 순간 자신의 윗잇몸 안쪽에 돌기 두 개가 혀에 불룩하게 걸렸다. 혀끝으로 누르면 물컹하니 핏물이 찼을 터였다. 학교 급식 자재 차 아르바이트는 다시 못 하겠고, 닭 일도 그만두게 되면 저쪽에 아침 세 시간짜리 대형 화물 상차 일이 하나 있기는 있었는데 허리며 어깨 상태에 감당이 안 되었다. 

  평수 크고 비싼 새 아파트 단지들 옆길에는 차들과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제 영업도 못 할 거라면 말이지……, 죽을 때까지 숨어다니며 너는 이 짓이나 하는 거다.

  분명 점주에게 계좌번호를 적어 주었으나 한 달 동안 일한 돈이 삼 일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두 건을 못 막아서 전화벨로 시달렸다. 

  “오늘은 사장님, 제 거 넣어 주실 수 있나요?”

  퇴근할 때 그가 물었더니 점주는 가만히 돌아보곤 눈을 또 껌벅껌벅했다. 

  “……저기, 그런데 말이지. 넣어 주긴 넣어 줄 건데 봤다시피 요즘 가게에 주문이 많이 떨어져 가지고……”

  신입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단 말인가. 종일 붙어서 일 잘하는 젊은 직원이 있으니 이젠 자신이 필요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좋다. 하지만 그리 되는가 한번 보자. 내 버티면서 지켜봐 주마……! 

  하루하루는 괴롭게 흐른다. 동동주 몇 주발 걸칠 때가 그중 좀 나았다. 그거 한 병과 담배, 새우 과자를 사러 그는 그 슈퍼로 갔다. 

  “칠천오백 원이시어요.”

  매번 그는 지위 대단한 어떤 인사를 소개받는 느낌이었다. 돈이 진정 대단하기는 한 거라서 다들 진짜로 이러는 것일까……. 커피점 아르바이트 아가씨들은 또 이렇게 한다. 

  “만 이천 원 나오셨습니다.”

  “……봉투는 필요 없고요.”

  비닐봉지값을 내버릴 필요가 없다. 나이는 들었어도 볼 때마다 귀염성이 있는 계산원이었다. 그는 잠깐 친절을 건네고 싶었다. 

  “……이봐요!”

  마찬가지로 고단한 일상일 터였지만 그녀는 대단히 꾸준했다. 신용카드를 건네면서 그가 말했다.

  “돈한테 존댓말을 하면 그렇지 않나요?”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계산원은 눈웃음만 지었다.

  “사물에 존칭을 붙이면 틀린 건데……”

  “……전 무슨 말씀인지 잘……”

  끝까지 그는 친절하고 싶었다. 

  “한번 해 봐요. 칠천오백 원입니다.”

  그녀는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 고객님! 존댓말을 안 쓰면 다른 고객님들이 ‘손님한테 버릇이 없다’면서 뭐라고 하시어요.” 

  그렇게는 안 보았었는데 그녀의 멀뚱한 낯빛엔 뚝심도 묻어 있었다. 부아가 나서

  “그딴 것들이 무슨 고객이냐, 그냥 무식한 잡것들이지.”

  하고 뱉어주려다가 다 부질없는 일인 듯해서 그는 물건들을 얼른 넣고 들고 해서 그냥 뒤돌아 나와 버렸다.     




  대낮 열기는 짙어지고 피로는 누적된다. 또한, 경멸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K 모바일 메신저 ‘친구’들의 ‘상태 메시지’ 같은 데에는 무슨 유행인지 그 말이 꽤 올라왔다. 

  지나가긴 뭐가 지나간다는 건가…….

  “이런 썅!” 

  담뱃갑엔 달랑 반동 가리 꽁초 하나만 툭툭 부딪히며 굴러다닌다. 받은 푼돈은 순식간에 어디로 다 새어 버렸다. 그는 군대 생각이 났다. 그 가장 고통스러운 국민의 의무라는 것도 다했건만 세상은 누굴 더 엿 먹이려고 무슨 담뱃값을 이따위로 만드는 건가. 2000원씩이나 다짜고짜 쳐올려 이젠 한 갑 담뱃세가 3300원을 넘는다. 그 힘들었던 데서 빽빽 소리 지르며 그런 노래들을 했었다. 육군 10대 군가에도 두 개가 들어있다.

  “한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전우〉다.)

  “잠깐 쉴 때 담배 피며 구름을 본 후……”(또, 〈행군의 아침〉이다.)

  6.25 때의 그 유명한 진중 가요에도.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전우야 잘 자라〉다.)

  그가 스마트폰으로 확인해보았더니 이 한 맺힌 노래는 육군본부가 제작한 육군 군가 앨범에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군가가 맞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들은 더 죽여야 한다고 쾌재를 불렀다. 술집에 앉아 담배도 하나 꼬나물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은 아주 예전부터였다. 

  10분 정도 늦을라치면 평시와는 180도로 홱 바뀌어서 왕방울만 한 눈을 하도 희번덕거려서 그는 매번 그 집은 좀 피했으면 했다. 그 치킨집, 그러니까 ‘닭 맛이 기가 막혀’의 주인은 자기 친구의 친구라는 것은 아내에게 들어 알고 있었고, 아내의 친구는 또 자기 친구의 남편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그 친구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주인은 그보다 세 살 적었다. 

  “에이, 나 못해, 안 해. 사무실에 전화할 거예요!”

  그의 아내 친구의 친구가 눈을 막 부라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니까 금방 새로 갖다 드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로 기가 막혀서 그가 말했다.

  “아, 몰라. 아니 그걸 왜 다시 쓸어 담느냐고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는 왕방울을 몇 대 쥐어패고 싶었다.

  “……이런 일 하는데 사무실에 전화까지 하시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제가 물로 깨끗하게 씻어 드리려고 했던 건데.”

  아니다. 다 관두자. 이런 자식도 어쩌지 못하면서 내가 무슨? 

  “아니, 다시 가지고 올 필요 없어요. 이젠 내가 작업할 시간도 없고. 전화해서 사장한테 따질 거예요, 내가 맨날 얼마를 시키는데 이럴 수가 있어 그래?”

  시키긴 그리 시키되 전표엔 맨날 외상이 200만 원에 가까웠다. 발단은 이러했다. 그 집 앞에 트럭을 받치고 염장 11호 절단육 50kg, 그러니까 10kg짜리 다섯 봉지와 5kg짜리 봉지 무 두 개, 10kg짜리 치킨 무 한 상자를 테이블들 틈새로 이리저리 돌고 돌아 주방으로 날라다 놓은 다음 마지막 10kg짜리 냉장 근위(닭똥집) 한 봉지를 꺼내어 막 내리려는 상황이었다. 포장 비닐이 두꺼운 재질이었는데도 처음, 그리고 하필 그 집 앞에서 툭 하고 터져버린 거였다. 4분의 1쯤이 아스팔트로 쏟아졌다. 무심결에 그는 얼른 주워 담기부터 했다. 사무실 점주는 말고라도 문득 여자가 무서워진 거였다. 얼마 안 되니까 싱크대 물로 깨끗하게 씻어주면서 양해를 구하면 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는 말없이 나와 그 꽁초 반 동가리를 물었다. 정오로 가는 햇볕이 뜨끔댔다. 혹시나 해서 돌아왔더니 역시나였다. 

  “전화 왔었어요.”

  부장의 전달이었다.   

   



  뭐가 잘나서 내가 누구를 가르치고 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남들처럼 그 자체로의 인생에, 목 탈 때 마시는 차고 단 물 모금 같은 것에 만족지 못하고 주위를 전부 어느 하나를 향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게 옳은 노릇일까. 반드시 그걸 하지 않더라도 죽지는 않을 터인데 나 역시 조바심 속에서 스스로를 고달프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것 자체로의 그런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할까? 그러나 그 인생은 이미 덧없지 않았었나. 

  건물 옥상 두 면에 간판 대신 가로로 당겨놓은 현수막은 군데군데 벌써 바람에 찢겨 너덜너덜 날리고 있다. 달랑 두 명의 저녁 일을 끝낸 뒤 인적 드물 때까지 기다린 이슥한 밤과 일요일 새벽에 아파트 단지 뒷길을 걸어 돌며 자그맣지만 도톰한, 옛 거래처에서 외상으로 ‘무료체험 초대권’이라고 찍은 전단지를 한길에 줄지은 승용차들 운전석 쪽 차창과 그 고무 패킹 틈새에 끼워 넣고 다녔지만, 전화는 전연 오지 않았다. 

  “당신이 계속 틱틱거렸잖아?(‘툭툭거리다’가 바른말인지는 그도 알았다.)”

  아내는 애들하고 싸우고 있거나, 뚱하게 부어 TV만 쳐다보고 있거나, 혹 말을 섞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처음부터 툭툭거렸다. 아, 돈! 다 돈 문제였다. 

  “애들한테도 그렇게 틱틱거리니까 애들이 그러잖아?”

  주방에서 나가는 방화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살살 닫아. 옆집 시끄러워.”

  “시끄러워! 옆집 시끄럽든지 말든지.”

  아내는 빽, 소리 질렀다. 계속 이런 식으로 무엇을 어째야 한단 말인가. 돈이 없으면 행복을, 아니 적어도 평온을 살지 못하는 사람. 직장 일이 힘들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그리 툭툭거리는 건 그는 인내하기 어려웠다. 인내하기가 싫었다. 이로써 집의 괴로움은 또 한동안 흐를 것이다. 

  비련이나 궁핍 등 지난날의 내상은 어떠한 동통을 수반한 암영으로 현재까지 문득문득 드리워질 때가 있다. 그는 그럴 때 암울한 심정에 싸여 불행감을 느낀다. 찬찬히 둘러보면 주위는 그 옛날들보다야 훨씬 나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예 둘러볼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당시와 비슷한 참담한 심경으로 현재까지를 불행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원래부터 불행을 모르고 여러 면에서 부족 없이 지내왔던 이의 그것과 불행의 너른 늪 가운데 던져져 허우적거리다가 어찌어찌해서 굳은 뭍 위로 가까스로 몸을 빼 올릴 수 있었던 자의 그것, 즉 어느 순간순간 삶을 전부 정리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 심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자신은 원래부터 불행했었다는 그러한 느낌. 어쩌면, 그와 동갑이었고 이젠 먼 과거로 사라진 한때 이 나라 인기 최고의 모 여자 탤런트의 경우처럼.     




  자신은 집에서조차 고통스럽다. 초점 없이 식탁 위로 눈길을 떨구고 그는 괴롭기만 한 숨을 쉬고 있었다. 너무 힘이 든다, 너무……! 차체는 번듯한 대형 승용이래도 이제는 연식이 너무 지나 아래쪽은 뻘겋게 부식되어 몇 개 구멍이 나 있고, 밑바닥은 패킹이 다 삭아버려 볼트, 너트들이 덜덜대는 자기 차처럼 늙고 고장 난 자신 몸뚱이 속에 웅크리고 언제나처럼 한참을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양친이 주던 신용의 밑천까지 바닥났다. 건축물 등기부 등본. 3년 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결국 며칠 전 떼어본 모양이었다. 그건 난리였다. 전화, 욕설에 멸시, 낼모레면 자신도 오십인데 저주와 같은 모멸감. ……차라리 말이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 허리로, 자신 어깨로 더 살아간들 사는 게 아닐 것 같았다. 천천히 그는, 다시는 결코 삶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으로든 짐승으로든, 결코 다시는 생명이 있는 그 무엇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울에서도 유명한 부촌에 살던 그 사내는 3년 전 실직하기 전까지 누구나 알 만한 외국계 IT 회사의 재무였고 상무이사까지 달았었다. 한 대형 한방병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1년 만에 퇴직당했다. 이제 급에 맞는 재취업은 어려웠다. 실직 사실은 두 딸에게 숨겼다. 집 담보로 5억 원을 대출했다. 생활비로 써버린 1억 원을 제하고 2년 만에 4억 원 중 근 3억 원이 날아갔다. 

  미안해 여보, 미안해 얘들아…….

  지난겨울, 그 사내는 근저당 5억 원이 잡힌 자신의 널따란 아파트에서 처와 어린 두 아이에게 미리 준비했던 수면제를 각각 먹이고 재웠다.

  ……천국으로 잘 가려무나.

  그 사내는 거실과 큰방, 작은방으로 옮겨 다니며 처와 큰딸, 작은딸을 머플러 두 장으로 목 졸라 죽였다. 

  ……나는, 아빠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

  경찰은 여자들의 시신에서 별다른 저항 흔적을 찾지 못했으며, 범행 현장에는 그 사내가 쓴 것으로 보이는 그 같은 내용의 노트 두 장이 있었다고 했다. 

  너무 지치는구나, 너무 지쳐……!

  진정,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기를 아예 않는 것인가, 죽음! 그건 정녕 길고 싸늘한 밤에 불과할 것인가, 이런 삶은 무더운, 타는 낮에 불과할 뿐이란 말인가. 그는 하이네(Heine, Heinrich)가 옳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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