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친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1부

by 김욱래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상처 입은 늑대와 같을지어다.

피를 토하는 자기의 입으로 칼을 물어뜯는 그 늑대와 같을지어다.

― 르콩트 드 릴, 《야생의 시편》 <밤의 찬바람>




유월 하순의 그날은 덥고 습했다. 낮고 두툼한 구름이 지표면 위의 공기를 꽉 내리누르고 있었고 바람도 전혀 없었다. 희뿌연 수증기가 갑갑한 대기 속에서 한껏 팽창되고 있었다. 플라타너스들의 넓은 잎사귀들과 관목(灌木)들, 잔디밭과 잡풀들의 잎새에서도 흐릿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광택이 나는 카키색 군복은 그의 몸에 꼭 들어맞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빨지 않았던 새것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땀을 배출시키지 못했다. 아까부터 그는 특히 가슴골과 등줄기, 사타구니 부분의 기분 나쁜 끈적거림을 의연히 참고 있었다.

잠시 전에 그의 모친이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날, 연한 하늘색 투피스를 입은 그녀의 뒷모습은 오히려 한참이나 더 젊어 보였다. 그날따라 새댁 같은 걸음에선 어떤 편안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좀 전엔 다른 많은 면회객처럼 그녀는 대대 연병장 스탠드에서 아들이 속한 훈련병 중대의 일사불란한 총검술 동작과 사열(査閱) 행진을 구경했다. 그 후엔 다른 이들과 같이 연병장 사열대 뒤쪽 언덕의 잔디밭으로 가서 어른 키만 한 주목(朱木)이 뻗은 가지들 한쪽 아래 비닐돗자리를 깔고 군인 냄새가 나는 아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먹였다.


어릴 적만 해도 순하고 착했으며 머리도 좋아서 장래를 기대해 봐도 이상스럽지 않을 녀석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1학기 중간 때쯤부터 눈빛이 변하더니 점점 엇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더했다. 학교는 그냥저냥 다니는 것 같았지만―학교로부터 아들이 결석했다는 연락은 없었다―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며칠씩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소리를 치기도 하고 사정해보기도 했지만, 나중부터 녀석은 그럴 기미만 보여도 발끈하곤 시내로 나가버렸다. 그 후에는 아휴, 하고 그녀는 마주 앉아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는 장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집은 어느 소도시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적한 촌락에 있었는데 그 동네에서도 10분 정도 산기슭으로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녀석이 일곱 살 무렵, 시내에서 쫓기다시피 나와서 헐값에 산 산자락의 허름한 집이었다. 녀석은 산자락에 박힌 집이 싫었는지, 어릴 때 골목을 뛰놀던 시내가 그리웠는지, 걸핏하면 나갔고 며칠씩 애간장을 태웠다. 이제 군인이 되었으니 철이 좀 들겠지,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남편은 대단히 성실한 편이었지만 어떨 땐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다. 팔리지 않는 시집만 쓰면서 버티던 남편은 결국 시내에서 밀려 나왔고 다른 도리 없이 참나무 등을 잘라 버섯을 키웠다. 아들 녀석도 몇 차례 읽어보았는데 남편의 시들은 별 것 없었다고 했다. 나중엔 남편이 시인인데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인지, 농사꾼인데 시인이었던 적이 있는 것인지 당사자도 그녀도 잘 알 수 없게끔 되었다.

맏아들이 그토록 자신의 속을 썩이게 된 데는 사실 남편의 잘못도 컸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충실한 가장이었던 남편이었지만, 유독 녀석에게는 더 고지식했다. 가끔씩은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억압적이었고 손도 자주 댔다. 원체 녀석의 두뇌가 좋고 녀석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였는지는 몰라도, 그 어린 녀석을 아예 국민학교(國民學校)* 부터도 동네 애들과도 놀지 못하게 했다. 학교를 파하는 시간과 집에까지 걸어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서, 늦게 오면 때렸다. 방안에 가둬두고 감시하면서 교과서나 참고서―전과라 했다―의 일정 분량을 달달 외우게 한 뒤에 그걸 녀석이 줄줄 외워대는 걸 검사한 후에야 겨우 재웠다. 그게 매일 밤 방안의 풍경이었다. 어떨 땐 녀석이 안쓰러웠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가난에 찌들었던 남편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학교 공부에 대한 묵은 한(恨) 때문일 거라 여겼다. 키우는 방법이야 어찌 됐건 될성부른 자식을 어릴 때부터 다잡아서 못 푼 한을 기어이 풀겠다는 것에 반대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녀가 멀어져 갈 때 그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이제는 마음을 좀 편안히 놓을 수 있겠다는 그녀의 안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국은 일본강점기 1941년 일본 왕의 칙령으로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인 ‘국민학교’라는 용어를, 1945년 8·15광복 이후에도 계속 사용해 오다가, 1996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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