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처음부터 농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절대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고작 농사를 짓겠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도대체 왜 땡볕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하시겠다고 하는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또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까지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 아버지는 이따금 이런 말을 하시곤 하셨다.
서울 살던 때 일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취해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 자식들은 이런 곳에서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울을 떠난 것도 모자라 왜 점점 시골로 들어가냔 말이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더 잘난 친구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더 멋진 일을 해야지 나는. 그렇게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했고, 집을 떠났다.
그 이후로 아버지를 볼 일은 많지 않았다. 나는 기숙사에, 어머니와 동생은 원래 집에, 아버지는 시골 할머니 댁에 찢어져(?) 살았기에 더 그랬다. 집을 떠난 고등학교 생활이 만만치도 않았기에 아버지가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 정도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이전보다 엄청 덥고,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뿐. 집에 내려간 어느 날 아버지는 직접 찍은 나에게 영상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 영상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 논에 수많은 오리가 떼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이후 할머니 댁에 갔을 때, 아버지 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영상에서처럼 논 한 칸에 오리 2-30마리가 근무 중(?)이었고, 효과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주얼 하나만큼은 충격이었다. 아버지 말로는 이 오리가 논에 있는 벌레나, 잡초를 제거해준다고 했다. 이는 오리농법이라는 친환경 농법 중 하나였는데, 그 당시는 친환경이라는 개념조차 흔치 않던 때였다. 내가 제대로 본 첫 농장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들어가시고, 나는 도시에 남았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문제의 시간이 다가왔다. 한창 친구들은 취업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때 뭐에 홀렸는지 창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 수업을 제쳐두고 강의, 포럼, IR 등을 따라다니며 창업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이 그리 멋져 보였다.
문제의 여름방학, 창업을 해보기 위해 휴학을 하러 잠시 집에 내려갔더랬다. 집에 있는데 일을 마친 아버지가 집에 오셨고, 아버지가 직접 키운 토마토라며 나에게 토마토를 한 알 건네셨다.
나는 토마토를 싫어했다. 어릴 적 설탕에 절여 먹는 토마토나 입에 대는 정도였다. 반면 아버지는 토마토를 참 좋아하셨다. 심지어 토마토 심는 재미에 농사를 짓는다나 뭐라나. 여하튼 거절할 수 없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이 토마토가 담고 있는 당도나 산도는, 내가 이전에 맛 본 토마토가 아니었다. 마트에서 사 먹던 것과는 달랐다. 너무 놀란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토마토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
토마토는 원래 이런 맛이야.
원래? 대체 뭐가 원래야. 이전까지 나는 이런 토마토를 맛본 적이 없었단 말이다! 토마토를 싫어하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정도의 토마토라면 누구든지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의 토마토를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궁금증은 마음속에만 고이고이 간직했어야 했다. 이 때부터 평범하던 내 삶이 흔들렸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