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식 Jun 27. 2018

오늘은 학교에서 뭐 배웠어?  "차별이요"

말뿐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와 꼴찌 학교

고등학교 졸업한지 20여년, 뒤늦게 학교를 배운다. 나는 아이를 낳아 키워보지 못했지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아졌다.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에서 일하고부터다. 더 정확히는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일상과 그들의 감정을 알고부터다.


급식, 사무, 복지, 사서, 상담, 돌봄, 특수 등 다양한 학교업무에 종사하는 조합원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의 초점 중 하나는 아이들과의 관계였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 조합원들의 애정과 교육적 책임을 느꼈다. 365일 늘 그렇다면 과장이고 미화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조합원들은 오직 내 월급만 챙기면 그만인 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당연하고 당당해야 할 투쟁에서 조합원들의 망설임이 느껴진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힘이 없고, 게다가 착해빠져서 냉혹한 자본을 이겨먹기가 힘겹다. 아무튼 조합원들이 자신의 처지를 참아내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다.  

   

“학교에 내가 믿고 의지할 어른이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위의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그 결과의 옳고 그름만으로 학생을 선도와 처벌로만 다루는 건 문제를 오히려 키웁니다. 학교는 아이들의 스토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한국 교육은 학생들을 평가하려고만 합니다. 학교는 똑같은 책을 읽히려고만 합니다. 다양한 책을 읽히면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학교의 도서교육이 이렇습니다.”     


“따끔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따뜻한 교육이 더 중요합니다. 교과서가 아닌 사람으로만 가능한 교육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전교육은 교육이 아니라며 행정실무사에게 떠맡깁니다. 과연 그런가요? 교과목에 없다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 교육이 아닐까요?”     



- 을들의 아수라. 타인을 딛고 올라서야 성취를 이루는 교육     


조합원들과 이런 생각들을 나누다보면 노조 일만 전담하는 나조차도 교육적 역할과 책임을 고민하게 된다. 특수교육지도사 조합원들은 본능처럼 장애학생들을 “우리 아이”, “우리 아이”라고 부른다. 아이들과 따뜻한 눈빛과 몸짓, 말로 소통할 때면 모든 고단함이 순간 잊혀 진다고 한다. 물론 늘 그렇진 않다. 화도 나고 아이가 미워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고맙다고 인사해주는 부모님들, 졸업 후에도 찾아와 주는 아이들이 고맙고 보람이다. 특수학교는 장애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길이다. 그 길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힘겹게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봐주며,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피는 일은 소중하다. 나는 조합원들의 시선으로 학교와 교육에 대해 배우는 중이다.  

    

홀로 버티기도 힘겨워 자녀를 갖는 게 두려운 시대다. 혹독한 각자도생 세상에서 장애자녀를 키운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밑 빠진 사랑이다. 그 예민하고 몰입된 사랑의 대상인 아이들이 자신의 책임이 된 사람들, 특수학교의 특수교육지도사는 우리 전국교육공무직본부의 조합원이다. 그들의 일과 고충, 비집고 나와 고개를 쳐드는 감정들을 어느 작가의 도움에 기대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다.


탈고 과정은 무척 힘들었다. 행여나 아이들과 부모들의 마음이 다칠까봐 용어나 토시 선택 하나도 망설였다. 있었던 사실을 지우고 또 지우기도 했다. 겪어보지 않은 내가 느끼기엔 지나치게 움추린다 싶어 서글퍼지기도 했다. 장애아 부모들은 세상에 무릎 꿇어가며 생존을 호소하고, 그 무릎 꿇는 마음이 다칠까봐 다른 한편에선 자신의 땀과 눈물을 꺼내지도 못하는 또 다른 을들도 있다.


이렇게 만든 건 특수교육을 생산성 없는 비효율로 여기는 한국 사회의 후진성이다. 약하고 아픈 을들의 아수라. 타인을 딛고 올라서야 내 성취를 이루는 참으로 생산적인 한국 교육, 아무래도 이곳은 그렇다.

     

“공교육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창의성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명함에 자신을 학교 CEO라고 새긴 교장분도 봤습니다”     


“시험이 곧 자격은 아닙니다. 영양교사든 영양사든 영양실무 능력 외에도 상담능력, 공감능력, 교육적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어떨 땐 갑자기 와서 안기고는 선생님 사랑해요, 그러는 애들도 있어요. 예전에 한 애는, 2학년이었는데 학교를 안 왔어요. 근데 돌봄 교실 열릴 때쯤 와요. 간식 먹으러. 걔는 그게 한 끼였어요. 하루 종일 먹는 한 끼. 안쓰러우면서도, 마음 둘 데가 있구나 안심이 되기도 하고….”     


돌봄교실은 전국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학교의 확장된 기능 중 하나지만, 돌범전담사의 역할과 고용, 처우를 규정한 어떠한 법도 없다. 법으로만 보자면 이들은 학교에 없는 유령들이다.  


그나마 일부 교육청에선 조례를 통해 교육공무직이란 명칭을 부여하긴 했지만, 여전히 교육부는 학교회계직으로 부른다. 역할이나 별도 인건비도 책정되지 않는 사람들, 학교 (사업비)회계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 즉 교육주체가 아닌 사업에 종속된 일부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우개선을 위한 뚜렷한 법적 근거도 없고, 여차하면 해고 위협에 시달리기 일쑤다.     



- 공공부문 중 비정규직 가장 많은 학교, 정규직화는 꼴찌     


학교 비정규직이 만든 노조가 <전국교육공무직본부>다. 기본급은 대다수가 160만 원대, 최저임금 수준이다. 노조로 뭉쳐 10년째 투쟁하고 있지만, 공무원에 준해 차별을 받는 처지라 한자리 인상에 머무는 공무원 기본급 인상률 이상으로 기본급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차별개선이 어려운 구조다. 그래서 겨우 쟁취해낸 우회로가 상여금이고 식대고 교통비며 맞춤형복지비다. 여기에 최저임금이 매년 오르는 게 그나마 희망이다.


그런데 별안간 최저임금법이 바뀌어 내년부터 정기상여금과 복리후생비가 최저임금에 포함된다고 한다. 최저임금이 올라도 인금인상에 반영되지 않고 2024년 이면 기대했던 연간 인상분의 최대 400여만 원이 사라지게 됐다.

      

6월 30일 비정규직 노동자 수만 명이 서울에 모인다. 다수가 학교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책임에 걸 맞는 교육공무직 법제화를 요구한다. 자신들의 신분과 역할을 제도를 통해 인정해달라는 요구다. 그래야 그들의 교육노동도 자리 잡고 권리와 책임에도 충실할 수 있다. 그밖에도 학교 공무원들만 받는 근속수당 가산금을 요구하며, 최저임금법 개악으로 빼앗긴 인상분을 되찾고자 최저임금 인상액만큼 기본급 인상도 요구한다.

     

가정도 그렇지만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돌보는 교육주체가 제대로 대접받아야 양질의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 특히나 교육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는 일이며, 학교에서는 불평등하고 소외받는 현실을 목격하는 곳이 아니라, 희망을 배우고 체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세상을 돌보는 일이며, 더 낳은 교육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길이기도 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아프리카의 속담을 인용해 유명해진 격언이다. 그런데 한국이란 마을은 절망에 찌들었고, 학교란 마을엔 차별이 즐비하다. 학교 비정규직 40만 명에 비정규직 직종 80여 개, 공공부문 중 최대다. 그럼에도 정규직 전환은 고작 11%, 공공부문 전환 중 꼴찌다.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한 정부는 언제까지 학교를 비정규직 백화점으로 방치할 셈일까? 6월 30일 비정규직 총상경 투쟁은 거둘 수 없는 커다란 질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법원, 학교 영어회화전문강사도 정규직 전환 대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