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사계 ③] 맨발의 비

사계와 별빛

by 불망

여름은 늘 비와 함께 왔다.

맨발로 뛰던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내 안에서 젖어 있다.


서울의 불빛은

낯설 만큼 화려했다.


동창들이 모여 앉아 술잔을 주고받고,

웃음소리는 옛날처럼 터졌지만

나는 묘하게 어색했다.


최대한 차려입고, 나름 태연한 척했지만

잘 나가는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저 멀리서 교정기를 드러내며 웃던

그가 보였다.


수많은 조명과 소음 속에서도

그의 웃음만은 유난히 선명했다.


나는 늘 굵은 목소리와 그을린 피부였고,

그는 가는 목소리에

조명판처럼 하얀 피부를 가졌다.


닮은 구석 하나 없던 우리였다.


말없이 위축된 나와는 달리,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는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럼에도

한 번, 두 번…

묘하게 시선이 오갔다.


가슴이

낯설게 움직였다.


한 잔, 두 잔.

나는 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어서

술잔을 비웠다.


쓰디쓴 술이 용기로 바뀌는 순간,

모임은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술에 취한 나는

제법 노래를 잘 불렀다.


마이크를 붙잡고 연달아 노래를 부르던 사이,

그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급히 밖으로 나섰다.


두리번거리다 화장실 쪽으로 향했을 때,

그는 막 문을 열고 나오던 참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도망치듯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저기요, 전화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번호를 건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정작 그의 번호는 받아두지 못했다.


기약 없이 헤어진 후,

며칠 내내 그의 연락만 기다렸다.


휴대전화는 손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진동이 울릴 때마다

낯선 번호가 그이길 바랐지만,

한동안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쯤 지났을까.

벨소리가 울렸다.


낯선 번호.

그 사람이었다.


다시 만난 우리.

그날 이후, 빠짐없이 함께였다.


비 내리던 밤,

효창공원을 걸었다.

우산은 끝내 쓰지 않기로 했다.


그의 운동화와 내 구두를 벗어 들고

우리는 맨발로 빗속을 걸었다.


그의 운동화를 농구공 삼아

골대에 던졌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아이처럼 환호했다.


한참을,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뛰어다녔다.


옷이 홀딱 젖어

속옷까지 흠뻑 젖어들 때까지.


빗물은 쏟아지고,

웃음은 터졌다.


분명 그의 웃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 웃음보다

그 뒤에 남은 공허함이

더 뚜렷해져 버렸다.


살아오며 내 인생에서

그렇게 무모했던 순간은

단 한 번뿐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나는 다시는 맨발로 거리를 걷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선 적도 없다.


그저 이제는

비 오는 거리를

우산을 쓴 채

혼자 걸을 뿐이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