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늦은 시간 고속도로는 처음이었다.
도로 위는 말 그대로 '살벌'했다.
내가 불과 몇 시간 전 지나온 길이 맞나 싶을 만큼 낯선 기분이었다.
고속도로 진입램프를 지나서, 백미러로 차간 거리를 확인하고 핸들을 꺾으며 들어가려는 찰나.
내가 알던 그 속도가 아니다. 마치 영화 '여고괴담' 귀신의 움직임처럼 성큼성큼 가까워 온다.
안 되겠다 싶어 좀 더 직진한다. 갓길은 끝나가고 마음은 초조하다. 속도를 다 멈추면 진입하기는 더 힘들어질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 밤 고속도로 위 이 쫄보를 불쌍히 여기는 차는 한 대도 없다. 매서운 행렬이다.
가까스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성난 차들은 순식간에 곁을 지나간다. 내 계기판을 쳐다보니 나는 거의 120km/h로 달리고 있다. 나는 달려본 적도 없는 속도다.
이 마저도 느리다고 뒤에 따라오는 차는 상향등을 깜빡이며 경고를 하고 지나간다.
큰일 났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분위기 있는 노래를 꺼버린다.
엉덩이를 의자에 바싹 붙이고 허리를 세운다.
출발하기 전 안경을 꺼내 쓸 걸 후회를 한다.
등에서 허리까지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심호흡을 하고 엑셀을 조금 더 밟아본다.
직진 길에서는 문제없었지만, 완만한 커브길 하나에도 차가 휘청하며 차선을 넘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섰다는 판단이다.
속도를 줄이기로 한다.
늦은 밤 고속도로에선 잠깐 잘못해도 접촉사고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남의 속도를 따라가다간 골로 가게 생겼다.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120km/h은 내 속도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미련하게 달린 날 생각하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회사에서 밥을 빠르게 먹기로 유명한 전무님과 식사를 했다.
그 뜨거운 국밥을 어찌 그렇게 순식간에 해치우시는지.
그걸 보며 열심히도 따라먹었다. 그날 난 생전 해본 적도 없는 급체를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절반도 못 먹었지만, 성급하게 목구멍으로 부어 넣은 밥이 화근이었다. 내 속도가 아니었던 탓이다.
운동을 배울 때도 그랬다.
나는 좀 느리다. 순식간에 동작을 파악하고 잽싸게 따라 하는 부류는 확실히 아니다. 조바심이 나서 마음만 앞서서 성급하게 했다가는 될 동작도 안된다. 여지없이 스텝이 꼬인다. 나는 운동에 버퍼링이 좀 많이 걸린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운동에 잼병인 나도 잘하는 운동이 하나 있었다.
운동회마다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열렬한 응원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종목. 바로 장거리 달리기였다.
목청껏 소리치는 친구들의 응원소리 듣노라면, 긴장감이 감돈다. 대표 선수들이 출발선에 선다.
출발을 알리는 '탕'소리와 함께 동시에 우르르 달려 나간다.
경기의 시작이다. 함성소리가 커지고 흥분한 아이들은 모두 앞다투어 선두 쟁탈전을 벌인다.
나의 전략은 하나였다. 그냥 무조건 느리게 가는 것.
내가 아무리 느린 속도로 가더라도 3바퀴도 채 돌지 않아 나보다 뒤처지는 선수들이 여럿 생긴다.
5바퀴쯤 달렸을 때는 나는 선두권에 진입했다.
나는 여전히 계속 천천히 달릴 뿐이다.
달리다 보면 출발선을 지날 때 신호가 온다. 마지막 바퀴란 뜻이다. 지금이다! 그때부터 난 있는 힘,없는 힘 쥐어짜내기 시작한다. 물론 아무리 천천히 달렸다 해도 내 배터리는 이미 방전 직전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예비 배터리를 쓰지 않았다. 살짝만 속도를 올리자,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감각도 없는 내 다리에 조금의 힘을 불어넣는다. 속도를 내며 몇몇 친구들을 마지막 바퀴에 역전할 때마다 느껴지는 그 아찔한 쾌감이란.
5등이다. 물론 타고난 실력자들을 이기기엔 내 실력은 비루하다. 그래도 반에서 잘한다는 아이들은 다 나온 이 경기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100m를 20초대로 돌파하는 느림보 내가, 잘한 건 딱하나 '페이스 조절' 뿐이다.
누구나 자신의 속도가 있다.
남들이 다 빠르게 달린다 해도, 그래서 내가 이만큼 뒤처진 것 같다해도 해도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남의 속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의 속도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인생은 장거리 달리기 같은 승부를 겨루는 레이스도 아니다.
그저 자신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자신의 속도로 이 인생을 달리면 된다.
스스로가 통제가 가능한 속도로,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꾸준히 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