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우주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엔 너무 크고,
시간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기엔 너무 깊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힌두교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브라흐마의 하루는 86억 4천만 년이다.”
그리고 브라흐마가 1년을 100번 보내면,
그는 다시 신과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잠시 책장을 덮었다.
‘하루가 86억 년이라니.’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 태양의 나이가 약 50억 년이라고 배웠는데, 그보다도 더 긴 시간을 ‘하루’라 부른다는 발상.
그건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이었다.
더 놀라운 건, 이 개념이 현대 우주론보다 훨씬 이전 —
수천 년 전의 인도에서 이미 사유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짧은 생 안에서 ‘영원’을 그려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 상상력이 문자로, 신화로, 교리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비롭다.
우주는 태어나고, 팽창하고, 식고, 다시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숨을 들이쉬듯’ 폭발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 신화적 세계관은 현대 우주론의 ‘빅뱅과 빅크런치’ 개념과도 닮아 있다.
수천 년 전의 인간이 이미 이 우주의 호흡을 상상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브라흐마의 시간으로 보면,
인류의 문명은 그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찰나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 사랑, 전쟁, 기억 —
그 모든 것은 신의 잠결에 스친 꿈처럼 짧다.
하지만 그 짧은 꿈 안에서도 인간은 별을 바라보고, 우주의 시간을 헤아리려 한다.
그건 어쩌면 ‘신이 인간 안에 남긴 호기심의 불꽃’ 일지도 모르겠네.
하루살이가 인간의 생을 상상하지 못하듯,
인간도 우주의 시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이해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주의 일부로서 깨어 있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찰나 속의 영원이고,
영원 속의 찰나다.
이 책은 내게 우주의 시작과 끝보다도 더 깊은 감정을 남겼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짧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 짧음 속에서도 얼마나 찬란히 살아가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나는 묘한 우주적 우울감과 동시에,
이 거대한 시간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 감정이야말로,
우주가 우리 안에 심어둔 ‘깨어 있음’ 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