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미술 이야기1]
*안임신: 애니메이션 제목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의 줄임말
이 영화를 만드는 지난 1년 동안 많은 멘토들을 만났고, 시나리오와 콘티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그 중에 가장 타격감이 컸던 것은 '극 중 인물에게 공감이 안 간다'는 코멘트였다. 사람들의 공감을 못 사는 이야기를 만들거면 그냥 골방에서 나 혼자 쓰고 나 혼자 읽고 말지, 애니메이션씩이나 만들 필요가 있을까해서. 이런 고민을 다른 멘토에게 털어놓았더니, 그건 감독이 무엇을 원하는 가에 달려있는 거라는 우문현답을 주었다.
(시드니 루멧 "영화를 만든다는 것" 중에서)
작년 봄, 그러니까 2021년 4월, 지도교수님은 안임신 시나리오를 읽고 이 영화는 결국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읭? 내가 쓴 글이 그런 내용이었나? 싶었다. 물론 남자 주인공이 다음 행동을 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모성애가 작동하기는 한다. 나는 솔직히 이 부분이 영화의 허점인 것 같아서 지금도 찜찜하고, 또 가장 크게 내세우고 싶은 메세지도 아니다. 멘토링 후에 교수님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던 중, 별안간 교수님은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봤다. 없다고 했다. 결혼은 안 할 건가? 음, 글쎄요 하면 좋겠죠?
그래도 애는 낳아봐야돼.
네?? 갑자기 뭔가를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딩~하고 울렸다. 교수님은 내가 쓴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으신걸까? 나는 "여자들이 왜 애를 안 낳는지 잘 좀 생각해봐라!!" 외치는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급진적인 소재로 칼을 빼어든 것 치고는 결말이 다소 온건해서 착각하신건가? 아니면 내가 시나리오를 완전 잘 못 쓴건가?이거 뭐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속으로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교수님은 차분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요컨대 이런 거다.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인간은 성숙해진다. 자식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경험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그러니 애를 낳아야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xy염색체를 가지고 계신 교수님이 내 시나리오를 읽고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어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신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시나리오는 교수님 말고도 많은 남성들에게 읽혔는데, 대부분 이 이야기를 재미있어했다. 나는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차라리 딴지를 걸거나 화를 냈으면 기분이 좋았을까? 나는 그들이 즐거우라고 쓴 글이 아닌데 말이지. 모두가 교수님과 같은 알고리즘을 갖고있는걸까? 아니면 자기는 이런 이야기를 '허락'할 수 있는 진보적인 남성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인가.
아무튼 나는 교수님의 확증편향을 막으려면 어떡해야하나 생각해봤다. 나는 교수님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근데 시나리오를 고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연출과 미술에 달렸지.
나는 인물의 피부색이 일반적인 상아빛이 아니기를 바랐다. 시나리오를 다 썼을 즈음, 나는 그냥 막연히 여자주인공 유진의 얼굴을 하늘색으로 설정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서, 어디에서 상이라도 받으려면 무난한 아트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또 인스타그램을 탈탈 털었고, 한 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색깔을 쓰는 그림책 작가 한세희씨를 미술감독으로 섭외했다. 그리고 세희씨가 설계한 컬러스크립트를 기반으로 완성 스틸컷을 하나하나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고 지도교수님이 말했다.
이렇게 아트가 특이하면 너무 정신없고 관객이 공감하기 힘들어~
어라? … 됐다! 성공이다!! 역시 교수님은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는 참된 길잡이셔!
ps.
같은 그림에서 인물의 피부색을 상아빛으로 칠한 버전입니다. 어떤가요? 차이가 있나요?
다음 편은 미술감독 한세희씨와의 인터뷰입니다. 기대해주세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