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025
한국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 10시간의 비행. 10kg는 될 듯한 큼지막한 배낭에서 작은 책과 다이어리를 꺼냈다. 오후 9:20분, 비행기가 천천히 이륙을 준비하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상공을 향해 날아가는 걸 온몸으로 체감한다. 등받이에 기대어진 몸은 비행기가 바퀴를 뗄 때 마치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을 탈 때처럼 내 몸이 공중에 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은 긴장이 지나간다.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진 뒤에야 주변을 둘러본다. 잠을 자는 사람, 화장실을 가는 사람, 다운받아 온 영화를 보는 사람. 데이터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다가 다운받아 둔 노래를 듣는다. 미지의 나라로 가는 것, 조금 들뜬 마음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여행자의 기분은 작은 의자에 갇힌 지루한 10시간을 거뜬하게 견디게 한다.
하지만 과연 나는 이번 여행에 푹 빠져 새로운 나를 탐험하고 모든 낯설지만 익숙한 것들에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근 2년간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이번만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극심한 우울감이 찾아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망가지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로 나는 괴롭고 아팠다. 스물여덟, 2025년 11월의 나는 이제 어디가 나의 고향인지, 누가 나의 친구인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았다. 두 다리가 딛고 있는 모든 곳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도망치듯 다른 나라로 갔다. 일 년 동안 10개의 나라를 돌았다. 한국엔 2달도 채 있지 않았다. 해답을 찾고 싶어서 떠난 새로운 곳들에선 해답 대신 수백 개의 물음표가 돌아왔다. 삶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차 매일매일이 괴로웠다. 매일 밤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잠에 들었다.
대학 친구의 결혼식으로 부산에 들렀다가 자취방 짐을 정리한 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날. 아침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씻지도 않은 채(내가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씻지도 않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짐을 싸면 쌀 수록 집은 더 어질러지기만 했고 결국 짐을 싸지 못했다. ADHD와 우울증 진단을 받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작은 캐리어에 무얼 담을지 몰라 다음날 서울 가는 일정을 취소해 버렸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책상에 앉아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다. 하나의 생각은 수백 가지의 생각으로 퍼지고 나는 단 몇 초도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둥둥 대는 심장소리는 베이스기타처럼 두 귓가를 감쌌다. 하루 종일 짐을 싸지 못해서 서울 가는 일정을 미룬 스스로가 한심했다. 병신 같았다. 나의 머릿속은 너무도 정신없고 24시간 돌아가는 공장같이 시끄러워 내 안의 다른 내가 나를 조종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침대에 누울 자격도 없다며 책상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충동적으로 밴쿠버에 가기 일주일 전 오사카행 비행기를 끊었다. 오사카에 여행 가있는 친구가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했다. 걔도 날 좋아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나는 일본이 처음인 친구에게 가이드가 되어줬고 친구는 내게 진심 어린 위로를 줬다. 우리는 주고받는 존재였다. 그뿐이었던 거였다. 나는 친구에게 내 고민들을 쏟아내듯 말했다. 한국말로 해야 되는 말들을 영어로 하니 내 기분을 백 퍼센트 이해 못 해줄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는 내 얘기를 잠자코 듣다가 자기가 대학시절 강박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을 때 읽었던 책을 추천해 줬다. 그 친구는 나에게 좋은 말들을 자주 그리고 많이 해줬다.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서점에 가 그 책을 샀다.
다정 어린 말들과 우리가 나눈 대화 속에서 깨달은 진심들이 내 안에 콕콕 박혔다. 오사카를 다녀온 후에 그 친구는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껴서였을까, 그 아이를 좋아하던 아픈 짝사랑에 한 풀 꺾인 고개처럼 나는 오히려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복합적으로 우울했던 기분도 나아졌다. 하지만 되려 쉽게 사랑에 빠지던 나는 이제 사랑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사랑 같은 건 지금 내게 사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이 순수한 마음이, 상대를 볼 때 상대의 좋은 점들만 눈에 들어오는 이 능력이라면 능력이, 흘러갈 법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눈동자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고 하는 이 사랑하는 마음이 미웠다. 이 마음들은 너무나도 유약한 존재라 깨지기 쉽고 현실을 분간하는 능력마저 없다. 늘 바보 같은 사랑을 하고 모든 걸 줬다. 여우 같은 사랑 따위는 내겐 있을 수 없는 거였다. 글쎄,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던 건 외로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사랑할 줄 몰라서 다른 사람을 대신 사랑하는 게 쉬운 거라고.
외로움에 사무쳐 빠지는 사랑은 금세 무너질 모래성 같은 사랑이다. 확신 있는 사랑. 사랑받을 자격은 내가 나를 충만하게 사랑할 때 생기게 되어있다. 흐린 시야의 사랑은 가짜 사랑. 내가 나로서 온전할 때, 깨끗한 시야의 동정 없는 진짜 사랑이 내게 온다.
- 캐나다에서 보내는 첫 날, 해가 빨리지는 이 곳,
Vancouver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