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제주-봄(2)

흙편

by 버미

비자림과 둔지 오름을 다녀왔는데, 숲편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오름편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나무편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부족한 감이 있어 제목을 흙편이라고 짓겠다. 울창한 나무도 좋았으나 내 발과 흙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인상 깊었기에!

비자림 입구

세화를 뒤로하고 비자림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일출 본다고 부지런히 설쳤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입장을 못 할 뻔했다. 코로나 방역 때문에 인원 제한이 있어서 내가 매표를 끝내자마자 그날의 매표가 종료되었다. 운이 참 좋았다.


제주도의 바다도 좋지만 숲을 더 좋아한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정말 잘 보전된 식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엄청나게 커다란 고사리들은 고등학교 지구과학시간에 배운 고생대를 생각나게 한다.

햇살과 숲길

햇빛이 나무 사이에 들어 동화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양쪽에 길게 만들어 놓은 돌담들도 올망졸망 귀엽다. 제주도에서 버스 타는 시간 빼고는 이어폰을 낄 새가 없었다. 숲에서도 흙을 밟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비자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꽉 채워진다. 심심할 틈이 없다. 가장 끝물에 들어와서 그런지 사람들도 없어서 자연의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여행을 혼자 다니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게 되는데, 비자림을 지나면서도 혼자 계속 감탄을 했다. "와.. 진짜 좋다.."

새천년 비자나무

마지막쯤 걸어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연리목이 오른쪽은 새천년 비자나무가 있다. 우선 새천년 비자나무부터 보러 갔다. 이름에 걸맞게 많은 가지와 풍성한 잎을 자랑한다.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멋지기도 하지만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나무는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이런 나무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연리목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연리목으로 향했다. 두 나무가 만나 하나의 나무가 되었다는 연리목.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싶다. 두 나무가 합치면서 맞닿는 부분을 통해 서로가 가진 성분을 섞고 잇는 과정이 있어야 이런 연리목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사람의 관계도 이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알아가고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벽을 허물고 나와 상대방이 서로를 이해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나무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한다.

나가는 길 귤나무

입구와 출구가 같은 위치에 있다. 들어올 때도 봤던 귤나무가 귀여워서 하나 찍었다. 비자림 다음엔 안돌 오름을 갈려고 했는데, 자동차가 없이는 조금 힘든 여정이 될 것 같아, 버스 정류장에 적혀있는 오름을 가보기로 한다.

둔지오름

810-1인지 2인지 모르겠다. 암튼 810번대 버스를 타니 제주도 안내원분들도 계셨다. 사실 둔지 오름을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어대 오름이나 알밤오름을 가려했는데 거긴 일반 운동화로는 조금 힘들 거라며 둔지 오름을 추천해주셨다. 도민분들의 추천이라 당연히 따라야지! 하고 내렸다. 그런데 웬걸 내려보니 정말 한적한 농지들과 적막만이 존재했다.

둔지오름 오르는 길

좀 많이 무서웠다. 올라가는 길에는 묘지들이 많았고, 오름도 탁 트인 게 아니라 숲 구간도 있어서 여기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면 진짜 무섭겠다 생각도 했다.


사실 오를까 말까 하다가 왔던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갔는데, 버스가 올 기미도 없고 거기도 너무 조용해서 '이러나저러나 무서운 거 그냥 올라가 보자'라는 심정으로 올랐다. 그래도 다음엔 인적 드문 곳은 삼가려고 한다. 혼자 간다면 정말 무서우니까 조금 인기 많은 오름을 가시길 추천합니다!

둔지오름 중간

무서움에 가파른 오름을 빨리도 올랐다. 빨리 정상 찍고 내려가자는 심정이었다. 숲 구간이 끝나자 보이는 전경에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제주도는 높은 건물이 없어 조금만 올라가서 봐도 한눈에 제주를 다 담을 수 있다. 제발 제주도에는 높은 건물을 짓으려는 자본이 들어오진 않았으면 좋겠다.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말 농장

말을 방목해서 키우고 있는 농장이다. 수능 국어에만 나오던 목가적인 분위기가 뭔지 느꼈다.

둔지오름 정상

결국 정상에 도착했다. 아까 중간의 풍경은 나무에 가려서 반만 볼 수 있었던 예고편이라면 정상은 본편이었다. 정상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조금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좋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나 꽤나 낯선 사람에게 대화를 잘 붙이는 편이다.

한라산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오름

조금 아쉬운 점은 이날 제주도에도 미세먼지가 많아서 한라산을 눈으로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오름이 한라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상에서 만난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다. 오늘은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고, 원래는 한라산도 보이고 잘하면 추자도도 보인다고!


한창 재미있는 제주이야기를 듣다가 할아버지께서 전화가 길어져 인사를 드리고 혼자 내려왔다. 오를 땐 겁나서 빨리 올라가려고 느끼지 못했는데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다. 로프를 잡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선흘 까페

.. 오름을 갔다가 집에 가려고 810번대 버스를 또 탔는데.. 이번엔 다른 안내원 분께서 어디 어디 다녀왔냐고 물으시더니 그럼 아쉬우니 카페 하나 들러서 좀 쉬다가 숙소로 가는 더 빠른 버스로 갈아타라고 추천해주셨다. 살짝 피곤했는데, 말 듣길 잘했다. 여행에서 조금 심심하거나 모르겠으면 무조건 거기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자.

백향과 에이드와 치즈 바게트

계속 걸어 다니느라 끼니를 제때 못 챙겼더니 순삭했다. 둘 다 직원분이 추천해주신 건데, 탁월하시다. 이 빵은 오늘 하루 많은 걸음으로 땀에 젖은 빵이라 그런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카페 앞 나무들

버스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제주는 낭만적이다. 둘러볼 게 없을 거라는 동네도 아기자기 귀엽다. 내가 제주를 사랑하는 이유다.

제주 벚꽃

서울엔 아직 멀었는데 제주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유채꽃도. 생각보다 벚꽃을 많이 보긴 어려웠는데 이렇게 갑자기 보니 반갑다.

돌고 돌아 숙소에 도착했다. 동문시장에서 회와 기념품들을 잔뜩 사들고! 일부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았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회는... 소주랑 먹어야 제맛인데... 어제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속을 생각해 주스로 대체했다. 꿀맛이었다.

엽서에는 나를 위한 편지를 썼다.

바쁘게 달리다가도 쉼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내용이었다.

제주항

아침 비행기로 제주를 떠나야 해서 숙소 앞바다에서 다시 올 거라는 혼잣말스러운 다짐을 하고 왔다. 제주도가 참 고맙다. 잃어버린 여유를 되찾아 주어서.

그리고 뚜벅이 여행도 기다림도,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꽤나 재미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비행기 안

여행의 끝은 늘 아쉽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어야 그 기억으로 다시 힘들고 바쁜 일이 있더라도 여행할 동력을 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여행에선 끝이 마냥 울적하지만은 않았다.


아쉬움으로 다시 올 제주!

이번 제주의 봄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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