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을 기다리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K언니의 추천으로 정세랑 작가의 글에 입문했다. 정세랑 작가의 글에는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진다.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물렁하지도 않은 메모리폼 베개 같은 느낌.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
책을 펼친 순간부터 문장에 매료됐는데, 정세랑 작가가 엄마 아빠에게 보낸 사랑 고백이었다. 이야기를 펼치기도 전에 감탄부터 하고 시작한다.
한아와 경민은 오랜 연인이다. 둘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임을 적어도 한아는 알고 있다. 한아의 절친 유리의 말마따나 한아만 베이스캠프가 되는, 경민은 자유로운 이상한 관계. 또 한 번, 경민은 모험을 떠난다. 역대급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캐나다로.
‘지나치게’ 오래된 연인이라고 나오는 이 관계에서 둘의 사랑방식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아는 경민을 걱정하지만 경민은 그렇지 않다. 한아가 느끼는 섭섭한 감정은 반복되는 연애의 과정 속에서 당연함이 돼버린 듯 보였다. 섭섭함을 견디는 것조차 일상이 돼버린 것 같은.
모험을 다녀온 경민이 왠지 수상하다. 한아가 불안을 느끼는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경민이 너무 다정해서다. 껍데기는 그대론데 알맹이가 바뀌었다. 한아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분노하며 초록색 빛을 내뿜기도 한다. 남자 친구가 두려워진 한아는 드라이브를 가자는 경민의 제안에 호신용품을 준비한다.
한아가 느끼는 감정이 단순히 경민의 없어진 흉터나 바뀐 경민의 성격에서 오는 불안함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껍데기 그 자체는 한아를 섭섭하게 했던 경민의 모습 그대로이기에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 불안함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감정도 혼재되어 있을 것 같다. 상대방을 걱정하고 기다리는 일이 자신만의 역할인 줄 알았던 한아가 새로운 경민이 그 역할을 맡게 되니 어쩔 줄 모르는 모습같이 느껴졌다.
동상이몽이었다.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산속 깊은 곳으로 향한 경민과 불안함이 극에 달한 한아. 사실 근데 밤에 차도 못 들어가는 산에 간다는 건 공고한 신뢰관계가 없다면 나도 불안했을 것 같다. 한아는 오죽했겠나 싶다. 운석이 떨어지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경민은 한아에게 고백한다. 한아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캐나다에 갔던 진짜 경민이는 우주여행을 떠났고, 지금 한아의 눈앞에 있는 경민은 외계인이라고. 한아는 오랜 연인이었던 진짜 경민에게 또 한 번 섭섭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번엔 한아는 감정을 참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욕을 내뱉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신형철 평론가의 <가장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문구가 생각났다.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이다.” 어쩌면 한아는 인간 경민이의 결핍을 이해하느라 한아 자신의 결핍을 이해하는 것은 뒷전으로 해온 게 아닐까. 한아가 울음을 터뜨린 그 시점에서 한아는 자신이 애써 참아왔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초록빛을 내뿜는 경민이는 그 자리에서 ‘2만 광년을 넘어’ 한아를 향해 달려왔음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정체를 한아에게 고백한다. ‘왜 이렇게 다정한 걸까’라는 한아의 불안함은 외계인 경민의 정체와 그의 마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같은 경민의 껍데기와 다른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가진 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한아의 사랑, 한아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그 모든 관계와 한 사람을 세계에 얽어매는 다정한 사슬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었다.”
외계인 경민은 인간 경민의 삶의 틀 안에서 살아간다. 이전과 이후의 경민의 행동은 한아가 보기엔 매우 다르지만, 경민의 가족, 친구 그 누구도 그의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유난 떠네’ 정도. 인간 경민이 떠난 자리에서 한아는 그와 자신의 관계를 깨닫는다. 그리고, 인간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도. 그저 경민을 지구라는 공간에 묶어두기엔 한아 이외의 이유가 없었고 한아도 그 자리를 다 채우지 못했을 뿐이다.
평범하고 달달한 외계인 경민과 한아의 삶에 우주여행을 중단한 인간 경민이 찾아온다. 한아는 이제 경민의 이름을 외계인 경민에게 붙이고, 인간 경민이에겐 엑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한아가 사랑하는 존재는 초록색 빛을 내뿜는 외계인 경민이기에, 애정이 담긴 그 이름을 차마 돌아온 엑스에게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생을 걸고 우주를 건너왔다는 설정을 빼고는 지극히 전남친스러운 엑스의 등장. 외계인 경민이는 엑스가 우주에서 지구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기에 그의 마지막을 한아가 함께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준다.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가 “...... 너야.”라고 밖에 꺼내지 못한 말이지만, 여기서 한아와 경민의 사랑을 확신했다. 엑스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함이 느껴졌다. 한아가 깨달았듯이 역시나 엑스도 한아를 사랑했다. 단지 한도가 작았을 뿐. 한아는 이제 안다. 엑스는 그 작은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한아를 사랑했음을. 그리고 엑스도 안다. 그의 최선이 한아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해 한아가 애쓰고 있었음을. 엑스는 “그 이름에서 날 발견하지 못한데도” 경민이 계속 그 이름을 써주기를 부탁한다. 엑스의 죽음으로 한아와 인간 경민은 완전한 이별을 한다.
“분절이 있어야 할 것 같았어. 그 사람의 마지막에 내가 끼면 안 될 것 같았어. 우리가 만났을 때 너무 연속되어 있었으니까. 그게 널 오래 혼란스럽게 했으니까. 이번만큼은 제대로 분절, 마디, 매듭을 만들고 싶었어. 내가 돌아와도, 바로 그 사람 대신은 아니게. 그래도 많이 힘들었지?”
자리를 비웠던 경민이가 오랜 뒤에 돌아왔다. 한아에게도 경민에게도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오랜 분절 끝에 한아는 엑스를 생각하지 않고 경민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분절 이후의 매듭. 정말 둘만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한아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물론 모험을 좋아하는 인간 경민이랑 성격은 더 비슷한 것 같다만. 사랑은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데, 나의 첫사랑이야기에서 나를 얼마큼 이해했냐고 따져보면 말하기가 참 어렵다. 상대를 이해하기 급급했고, 그에 맞춰주는데 열정을 쏟았다. 다 끝나고 난 후에야 나의 감정이 후순위였고, 표현에 인색했음을 후회했다. 한아처럼 다시 만날 인연은 아니라서, 정말 다 끝난 후라서 어떻게 표출할 길도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희망이라는 게 단순히 탄탄대로인 미래를 의미하는 건 아니랬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성숙하게 흔들리는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희망이랬다. 엑스에게 내가 느낀 감정과 깨달음을 털어놓을 순 없겠지만, 다가오는 외계인에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성장한 사랑을 함께할 외계인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