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 씨, 픽사에 뛰어들다>
다 알겠지만, 픽사는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픽사도 정말 찌질한 과거가 있다.
1995년 '토이 스토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 픽사는 하는 것마다 다 실패하고,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는 노답 골칫덩이 회사였다.
<레비 씨, 픽사에 뛰어들다!>는 그 초창기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다.
로렌스 레비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픽사의 CFO로 일한 사람이다. 레비는 1994-1997년의 픽사 이야기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풀어놓는다.
레비가 왔을 때 픽사는 역사상 최저점이었다. 1986년에 독립을 했는데, 무려 8년 동안 수익을 못 내고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2013년에 생긴 회사가 2021년까지 적자만 계속 났다는 소리. 진작에 폐업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원래 픽사는 컴퓨터 그래픽용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였다. 픽사가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이유도 주력제품인 영상 처리용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상 처리 컴퓨터는 너무 비쌌다. 아무도 사지 않았다. 결국 컴퓨터 사업은 3년 전 포기해버렸다.
투자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회사 오너였던 스티브 잡스가 적자를 자기 돈으로 메꿨다. 8년간 5,000만 달러(500억원)을 부었다.
사장인 에드 캣멀이 매달 부족분을 잡스에게 가서 얘기하면 수표를 써줬다고 한다. 현금도 유보금도 없이, 소유주 사재에 의지하는 회사였다.
영상 처리 소프트웨어나 단편 애니메이션도 만들었지만, 돈 버는 사업은 아니었다. 픽사의 유일한 희망은 벌써 5년째 만들고 있는 '토이 스토리'.
3D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토이 스토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이다) 너무나 제작에 난관이 많았고, 얼마나 성공할지 예측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픽사는 디즈니와 제작비 지원계약을 맺었다. 토이 스토리가 잘되어도 수익의 90%는 디즈니가 가져가는 형태였다.
이렇게 어딜 둘러봐도 노답이었던 픽사. 하지만 인재 파워만큼은 이상할 만큼 강력했고, 픽사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문화가 존재했다.
결국 이 사람들은 1995년 토이 스토리로 초대형 사고를 친다. 10년 존버 한방에 만회하고 드라마틱한 턴어라운드를 하게 된다. 그것도 그 후 시작된 블록버스터 연타의 시작일 뿐이었지만.
이 과정을 레비는 정말로 생생하게 풀어놓는다. 픽사의 사람들이 어땠고, 스티브 잡스는 뭐라고 말했으며, 회사에는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상장하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에드 캣멀이 쓴 <창의성을 지휘하라>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건 좀 더 경영서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 <레비씨, 픽사에 뛰어들다>는 정말 소설책같이 썰을 풀어서 몰입해서 읽게 된다. 중간 토이 스토리 박스 오피스 성적 나오는 부분에서는 살짝 소름까지 돋았다.
로렌스 레비도 유명인이 아니고 출판사가 제목을 저렇게 번역해서인지, 재미에 비해 정말 알려지지 않은 거 같다. (원제는 토이스토리 명대사를 패러디한 To pixar and beyond)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몰입해서 읽은 책. 콘텐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