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견문록 #9
폐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까 자전거를 탈 때 쥐가 났던 오른쪽 종아리가 아직 덜 풀렸나보다. 금방이라도 경련이 일어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코너를 돈다. 돌 때 느껴지는 원심력마저 버겁다. 앞에 있는 발판을 밟자 내 발목의 센서를 인식해 경쾌한 삑 소리가 난다.
이제 반 바퀴 남았다. 조금만 참자. 속도를 올려야 하는데 여전히 숨이 턱밑까지 차있다. 호흡을 크게 쉬면서 최대한 숨을 벌어보려고 노력한다.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호흡에 집중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한계까지 페이스를 밀어 올린다. 멍 때리는 순간 몸은 곧바로 느려지기 때문이다.
이제 약 500미터. 이미 저 앞에서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자 무의식 중에 에너지를 더 짜낸다.
마지막 코너를 돈다. 아치형 풍선으로 된 결승선과 기록을 보여주는 시계가 보인다. 전력질주를 한다. 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난다.
결승선 통과. 스태프가 와서 재빨리 내 번호를 체크하고 ‘873번!’라고 소리쳤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에 힘이 풀려 벌러덩 주저앉았다. 기다리고 있던 동아리 친구들이 어깨를 두드리며 물을 갖다 준다.
2017년 6월 10일, 내가 처음으로 트라이애슬론을 완주한 날이다.
내가 왜 트라이애슬론을 할 마음을 먹었을까? 그 답을 하려면 3년 전 갓 입대했을 때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원래 ‘스포츠 가이’ 타입은 아니었다. 헬스를 몇 번 끊었으나 흐지부지하고 말았던 흔한 학생이었고, 농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별로 소질이 없어 그냥 친구들과 가끔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에게 ‘철인 3종 경기’란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는 그런 단어였다.
그런 나를 바꾼 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입대였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체력단련을 아주 힘들게 하는 부대였다. 매일 7-10 km 정도의 산악구보를 뛰고, 2주에 한 번씩 체력 측정을 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강제로 뛰었다. 체력단련을 열외 하거나 처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선임들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을 뛰다 보니 느낌이 점점 달라졌다. 올라갈 때마다 토할 것만 같던 오르막길이 점점 쉬워졌다. 3km 달리기 측정을 할 때마다 내 기록은 계속 10초씩 줄었다. 체력이 향상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뿌듯했다. 여전히 체력단련은 쉽지 않았지만, 뛸 때 생겨나는 엔도르핀을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몇 Km 몇 분대에 들어오기’ 같은 목표를 정했다. 기록을 줄이려고 체력단련이 다 끝난 저녁 시간에 나가서 또 뛰었다. 단체로 뛸 때는 내 속도에 맞춰서 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인터벌 트레이닝을 했다.
그렇게 결국 어느 순간 목표로 한 기록을 깼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즈음에 대대 전체가 오래 달리기 측정을 했었는데, 대부분의 간부를 제치고 5등 안에 들었다. 대대장님이 헉헉거리고 있는 나에게 와서 ‘참 잘 뛰네요.’ 하셨던 기억이 난다. (대대장님은 모든 병사한테 존댓말을 썼다.)
그리고 철인 3종 경기(트라이애슬론)을 알게 되었다. 급 관심이 생겼다. 수영, 자전거, 달리기 3개 모두 내가 좋아하는 종목이었다. 오래 달리기보다는 훨씬 어려워 보였지만 수준별로 거리가 나누어져 있어 해볼 만하다 싶었다. 무엇보다 그냥 이름부터 멋있지 않은가. 철인 3종 경기라니. 완주하면 엄청나게 뿌듯할 것 같았다. ‘전역하고 기회가 되면 꼭 도전해봐야겠다.’ 다짐하고 마음속에 넣어두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나 네덜란드에 교환학생으로 왔다. 수업이 끝나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았다. 남는 시간에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학교 스포츠 센터를 찾아갔다.
센터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인기 종목인 축구, 농구, 배구는 물론이고 하키, 라크로스, 프리즈비, 클라이밍, 크로스핏 등등 리스트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뭘 해볼까 고민하며 쭉 훑어봤다. 새로운 환경에 왔으니 이왕이면 새로운 운동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마지막 즈음에 ‘트라이애슬론’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센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아니고 마스트리트의 공식 트라이애슬론 동아리였다. 이름은 ‘Ferro Mosae’.
보자마자 확 끌렸다. 지금이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안 하면 나중에 언제 해보겠어.’ 주저 없이 가입신청서를 썼다. 그렇게 나는 Ferro Mosae와 함께 트라이애슬론에 입문하게 되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동아리에 가입한 첫 1달은 멘붕의 연속이었다. 생각보다 트라이애슬론은 만만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일단 내 수준이 많이 모자랐다. 오래 달리기는 많이 했던 덕분인지 그렇게 많이 쳐지지는 않았는데, 수영과 싸이클링이 문제였다.
처음 수영 훈련을 시작할 때 기록 측정을 했다. 속도별로 레인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자랑스럽게도 맨 마지막 레인에 배정받았다. 나름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을 좀 했던 나인데… 기록을 확인해보니 나는 8분 30초인 반면 1위는 4분 초반대였다. 어떻게 400m를 4분에 끝내지? 입이 떡 벌어졌다.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수영 코치에게 트라이애슬론 초보자 코스를 완주하려면 어느 정도 기록이 나와야 하냐고 물으니 전체 8 레인 중에서 6 레인 정도까지는 와야 안전하단다. 6 레인을 쳐다보니 사람들이 발에 모터 달린 듯 쭉쭉 물을 가르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싸이클링도 자전거만 탈 줄 알면 되겠지 하고 우습게 봤다가 첫 싸이클링 세션에서 두 번이나 넘어졌다. 그룹에서도 계속 뒤처져서 미안한 마음에 페달을 마구 밟았는데 다음날 근육통이 엄청났다. ‘경주용 자전거를 타는 건 그냥 동네에서 자전거 타는 거랑 완전히 다르구나.’ 산 넘어 산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트라이애슬론이 꽤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일단 종목이 3개다 보니 필요한 장비도 3개였다. 그나마 수영이나 달리기는 괜찮은데 싸이클링은 가격이 정말 후들후들이다. 레이싱 바이크는 가장 싼 것도 수십만 원이었다. 그 외에도 싸이클복, 자전거용 신발, 헬멧, 안전 장비, 수리 장비 등 사야 할게 엄청 많았다.
동아리 임원 중 한 명인 마틴에게 장비를 어떻게 사면 좋으냐고 묻자. 마틴은 같이 가서 알려주겠다며 나를 스포츠 용품점에 데리고 갔다.
’ 이것도 필요하고… 이것도 필요하고…’ 마틴은 계속해서 바구니에 장비들을 던져 넣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들 다 꼭 필요한 거냐고 물으니까 마틴은 아주 최소한으로 필수적인 아이템만 고른 거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계산대에 갔는데 찍힌 가격이 엄청났다. 그렇다고 안 살 수도 없고… 눈을 질끈 감고 카드를 긁었다.
이렇게 트라이애슬론 장비들에 돈이 많이 들다 보니 동아리 멤버들 연령대가 주로 직장인 이상인 것도 이해가 갔다. 어쨌든 나 같은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꽤나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동아리 분위기도 적응이 잘 안됐다. 물론 모두 착하고 친절한 친구들이었지만, 솔직히 동아리라고 하기 무안할 정도로 완전한 개인플레이였다.
우리나라 운동 동아리들은 거의 운동 반 뒤풀이 반일 정도로 동아리원들끼리의 친목 활동이 중요한 반면, Ferro Mosae는 1년 동안 활동했는데 사적으로 만나서 놀았던 게 2-3번 정도밖에 안됐다. 각자 트레이닝 시간에 맞춰 모여서 운동하고 각자 집으로 간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친해질 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대부분 네덜란드인이다 보니 네덜란드어로 대화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서 옆에 서있기 뻘쭘한 적도 많았다. 가뜩이나 트라이애슬론도 처음인데 다른 멤버들과도 어색하니 초반에 좀 힘들었다. (물론 나중에는 많이 친해졌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꼬박꼬박 훈련에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왜 그랬을까? 트라이애슬론 완주한다고 누가 대단한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냥 트라이애슬론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수영하고, 뛰고, 자전거 타는 게 즐거웠다. 특히 운동을 마치고 나올 때의 그 개운함, 상쾌함이 정말 좋았다.
트라이애슬론의 매력은 뭘까? 축구를 즐겨하는 어떤 친구는 내가 트라이애슬론을 한다고 말하자 ‘계속 뛰거나 수영장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상대방과 경쟁하거나 0.1초 단위의 스릴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트라이애슬론은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트라이애슬론은 본질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 자신을 한계치까지 밀어 올려서, 꾸역꾸역 버틴다. 그러면서 그 경계선을 넓혀간다. 사실 말은 쉽지만 자신을 계속 한계까지 몰아붙인다는 건 정말 괴롭다. 훈련을 할 때마다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전보다 더 나아진 나를 봤을 때의 그 짜릿한 성취감이 있다. 해보지 않으면 느끼기 어렵다. 그리고 성취감이 계속해서 나를 뛰게 한다. 그래서 트라이애슬론을 표현할 때는 ‘재미있다’기보다는 ‘기분 좋다’라는 말이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훈련을 시작한 지 약 7개월 뒤에 네덜란드 Weert에서 열린 레이스에 참가해 완주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다. 초보자용 코스였고, 자랑할만한 기록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트라이애슬론 완주를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오래전부터 이루고 싶었던 목표였을 뿐만 아니라, 트라이애슬론을 하면서 중요한 배움도 얻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그릿’이라는 책이 있다. 책의 저자는 재계, 예술계, 학계, 체육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연구하고서, 그 사람들이 모두 ‘끈질기다’는 특성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책은 이런 특성을 ‘그릿’이라고 정의한다. 성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그릿’이라는 것이다.
끈기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건 너무나 식상한 말처럼 들린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다 이런 말은 누구나 듣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보고 아는 것은 아주 다르다. 트라이애슬론은 ‘끈기’가 실제로 내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지 알게 해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끈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성장 곡선이 일직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장 곡선이 일직선이라면, 우리가 어떤 일에 투입한 노력과 시간만큼 실력이 바로바로 향상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바로바로 캐치할 수 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훨씬 쉽다. 따라서 끈기보다 재능이나 조건 등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일들은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성장 곡선은 계단식에 가깝다. 이번 한 주 열심히 운동했다고 갑자기 내 체력이나 근력이 좋아지지 않는다. 단기간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길이 든 간에, 특히 초반에는 노력은 하고 있는데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불안해진다. 결과가 불확실해지면 점점 의욕이 떨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의욕을 잃지 않고 버틴 사람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훌쩍 발전해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 여태까지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 성장 곡선은 계단 모양을 그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과정이 ‘단단한 소수를 고르려는 우주의 선택’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트라이애슬론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외국어 실력, 악기 연주 등 인생에서 우리가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많은 것들이 이런 계단식 성장 곡선을 가진다. 하지만 이걸 ‘들어서 아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머리로 아는 지식은 몸이 힘들면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몸매를 만드는 데 가장 좋다는 걸 머리로 알아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과정을 거쳐서 성공해본 사람은 끝까지 앞으로 나아갈 확률이 훨씬 높다. 다른 어떤 것을 하더라도, 내가 노력하는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어느 순간에 결과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된다. 즉, ‘그릿’을 통해 성공한 경험이 다시 ‘그릿’을 강화한다. 트라이애슬론이 내게 가르쳐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