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견문록 #1
네덜란드에 와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모든 가게가 문을 일찍 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유럽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관광지나 대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가게들은 저녁 6-7시 이후에는 모두 문을 닫는다. 심지어 슈퍼마켓도 8시 이후에는 안한다. 주말에 영업하지 않는 곳도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24시간 영업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Maastricht가 작은 도시이기 때문인 점도 있다. 런던이나 암스테르담 같은 큰 도시에서는 좀 더 여는 곳이 많다.)
가게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의 근무시간도 짧다. 공식적인 근무 시간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다.
유럽에 온 많은 한국인들은 이 점 때문에 처음에 많은 불편을 느끼곤 한다. 나도 그랬다. 마음만 먹으면 집 앞 50m 거리 편의점에서 필요한 걸 살 수 있었는데, 마트를 해지기 전에 시간맞춰 가야한다니?
그런데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일하기는 좋다는 말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불편’으로 느끼는 이 문화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저녁 시간에 Maastricht의 광장과 스포츠파크에 갈 때 항상 이 사실을 느끼곤 한다.
저녁 6시쯤 되어 광장에 가면, 정말 어디서 나왔는 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차 (또는 술)을 마시며 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또 Maastricht는 도시 곳곳에 스포츠파크가 있다. 축구장이나, 육상 트랙, 수영장, 하키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체육공간이다. 스포츠파크는 평일 저녁에도 항상 사람들로 가득하다. 연령대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물론 겉모습만 본 거기 때문에 실상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통계치를 봐도, 네덜란드가 우리나라보다 나은 노동 환경을 가지고 있음은 틀림이 없어보인다.
요약하자면 짧은 영업, 근무시간이 소비자에게는 ‘불편’일 수 있지만 노동자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으로 이어진다. (사실 현지인들은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별로 불편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OECD 최고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될 수 없는 걸까? 단순하게 생각해봤을 때, 쉽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모두가 24시에 가까운 영업 시간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법으로 영업/근무 시간을 줄이도록 강제하면 어떨까? 바뀌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자영업자들은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춰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의 상식에 맞춰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들에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저녁이 없는 삶’이라는, 대부분이 바라지 않는 결과로 돌아온다.
재밌는 점은 단순화시켜보면, 대부분의 사회 문제들은 ‘죄수의 딜레마’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에는 두 가지 균형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두 죄수가 둘 다 자백을 하지 않는 것이 둘에게 (즉, 집단에게) 가장 좋은 균형점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배신’이다. 따라서 둘 다 배신을 하게 되는 균형점으로 귀결된다. ‘죄수의 딜레마’의 핵심은 협력했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합리적인/이기적인 선택을 하면 전체적인 최적보다 낮은 균형점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단순하게 생각해서 모두가 근무/영업 시간을 함께 줄인다면, 사회 전체적인 최적이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장 경쟁 기반의 자본주의에서는 누군가가 나보다 더 길게 일했을 때, 매출 혹은 일자리를 뺏길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문제라고 생각하는 긴 노동시간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쉽게 바뀌지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 문제가 죄수의 딜레마로 연결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움직이고, 자본주의는 시장 경쟁을 근본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쟁은 많은 부분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낳는다.
이 균형을 깨는 방법은 죄수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현실 사회에서는 두 명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사회 전체에 걸친 광범위한 협력은 2명의 죄수가 협력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래서 사회 변화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네덜란드의 노동환경이 좋은 것은 단순히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네덜란드도 처음부터 노동환경이 좋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으리라. 산업혁명 초기의 유럽 노동자의 삶은 처참했다. 하지만 유럽은 오랜 산업화의 역사를 통해 노동시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발달시켜왔다. 수많은 노력과 의식 변화의 결과로, 유럽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저녁이 있는 삶'이 이런 노력의 결과임을 잘 보여준다.
한 선배가 외국계 기업의 싱가포르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출근 첫날이라 업무 파악도 할 겸 6시 이후까지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직속 상사가 계속 불안하게 자기를 쳐다보더니 7시가 되었을 즈음 결국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선배는 ‘왜 그러지?’라고 생각했고 아무 문제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상사가 말했다.
“문제가 없다면 지금 퇴근해줬으면 좋겠다. 네가 이유없이 야근을 하면 여태까지 지켜온 소중한 기업문화를 해치는 거야."
한국의 죄수들은 언제쯤 딜레마를 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