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범지니 Sep 12. 2024

조각상

새로운 지식과 낯선 환경의 적응은 나를 바꾼다.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상태는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대체로 세상과 내 관점의 차이로 생긴 인지부조화는 '세상을 바꾸거나' 혹은 '나를 바꿈으로써' 조화를 이루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변화와 발전에서 느끼는 감정이 신선할 수 있으나, 원치 않는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스트레스의 끝단에서 마주하는 것은 상처투성가 된 몸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사실은 미래에도 변화의 고통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걱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었고, 걱정의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화와 적응의 과정에서 개인을 탐구할 필요가 있었고, 그 답을 조각상에서 찾았다. 지난 과거의 고통, 갈등, 걱정, 불안은 모두 나에게 상처로 남았고, 이것은 마치 상처가 온몸에 있는 것과 같았다. 나를 깎아 세상에 맞추고, 타인에게 맞춘다. 나는 마치 상처뿐인 조각상이다. 


대리석은 깎여 나가 형태를 이루는데, 그 모든 상처들은 제삼자인 조각가가 만들어 낸다. 당하기만 하는 대리석은 작은 칼에 의해서 상처를 받고,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물리적 상처는 심리적 상처로 변모한다. 조각가는 계속 깎아내기만 할 뿐이다. 이 불쌍한 수동적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영향은 끊임없는 멈추지 않는 칼을 몸에 대는 행위이다. 이러한 상처투성이 조각상은 어쩌면 개인의 고통에 대한 비밀을 알려줄지 모르겠다.



조각상이 설령 그 형태가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조각상에게는 단지 흔적이 있을 뿐이다. 이는 개인과 세상의 관계와 유사하다. 세상, 타인, 혹은 자기 스스로 칼을 들어 깎아내서 형태를 변형하는 것은 단지 고통일 뿐이다. 모든 주관적인 해석을 배재하고 개인에게 오는 변화는 조각상의 상처이다. 그러나 조각상의 상처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아름다움으로 비친다. 그 형태가 반듯하고 의미를 담고 있어 예술의 흔적이 될 수 있다.


나는 조각상의 상처로부터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예술의 흔적은 조각상이 바라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관중의 해석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조각상의 입장에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당사자인 조각상은 칼자국으로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타자에 의해서 그 흔적이 예술로 해석되는 주객전도가 발생한다. 원치 않는 변화는 세상에 놓인 개인의 상황과 닮아있기에, 


대체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를 유도한다. 친구와의 갈등, 시험의 탈락, 건강의 악화, 업무 스트레스, 시험의 합격. 이 모든 것들은 변화이고 대부분의 변화는 조각상의 칼처럼 날카롭게 상처를 준다. 모든 것들이 상처이므로, 사실 모든 것들은 단지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상처라고 여기는 것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기분에 따라서, 내 상황에 따라서 결정 나는 것이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흔적 중에서, 나는 어떤 칼자국은 상처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고, 또한 어떤 자국은 추억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세상이 남긴 칼자국의 흔적에서 상처와 추억의 차이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개인이다. 그렇기에 변화에 대해서 개인이 가지는 책임은 흔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적의 해석에 있다.


조각상의 흔적들을 상처라고 부를지, 값진 경험이라고 부를지 결정한 것은 나이다. 또한 흔적의 상태인 상처와 추억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나쁜 일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상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해석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다르기에 심지어 객관적이지 않다. 예로, 말을 타다가 다리는 다치는 게 부정적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후에 전쟁으로 동원에 면제가 되는 상황에서 해석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새옹지마).


세상에는 나라는 대리석에 대해서 멋대로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다. 

나는 깎여나간다. 칼자국이 남는다. 

지나가던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멋지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예술이 아니라 상처이다.

 

변화에 적응하는 개인은 다른 사람보다 앞으로 더 많은 칼날을 경험할 것이다. 그 칼날은 실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지 대리석에 지나지 않는다. 남이 칼을 대던, 내가 스스로 대던, 나의 가치는 조금씩 깎여나가서 조금씩 형성되는 아름다움에 있다. 


누군가 나에게 칼을 들이댄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단지 그 부분을 조금 다듬어서 

나의 예술로 수정할 뿐이다. 


나는 마치 조각상의 흔적처럼, 간혹 힘들 때, 상처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흔적을 지닐 뿐이다.  

다만, 칼로 써진 조각상의 흔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두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